김초엽, 책과 우연들
성인이 된 후, 나에게 일과 가족이 갖는 의미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나의 문제를 풀기'였다. 나의 결핍을 보완하거나 내가 가진 흥미와 관심사를 채워줄 수 있는 삶을 스스로 만들고 싶었고, 나의 가족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과 타협하라는 유혹(?)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결혼, 자녀교육, 커리어 선택에 있어, 이런 나의 욕구와 바람을 다른 무엇에도 희생하지 않고 완전하게 실현하고 싶고, 이 문제는 내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와 같은 특정 직업군만 이렇게 나의 문제를 푸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에서 그녀가 직업적으로 낯선 영역이었던 논픽션을 쓰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흥미를 따라가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기'가 꼭 어느 특정인에게만 허용되는 일은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와, 언젠가 이런 글을 꼭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책의 작가로부터 과학기술-장애에 관한 글을 써보자는 제안은, 학창 시절 논픽션 작가를 꿈꾸었던 SF소설가에게 황홀한 기회였을 것이다. 본인의 경험과 지식이 미천한 분야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엔 너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랄까. 그렇게 저질러 연재를 시작하고 나니,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 전문지식을 얻기 위한 자료 수집의 방대함, 그러면서도 감정과 생각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에세이 쓰기에 대한 고민들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 김초엽, 정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가 탄생할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는 작가가 본인의 경험과 장애 정체성을 진지하게 돌이켜보면서 였을 것이다. 장애의 경험이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이 될 수 있는 '감정' 없이 장애를 바라보는 '입장'만 가지고는, 처음 '과학기술-장애를 다루는 글'에 끌렸던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글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논픽션 글쓰기라는 난관을 뚫고 미흡한 영역을 채워가며 그 주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느끼며 책을 내는 과정은, 나도 그런 나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시도들을 해보겠다는 결심에 용기를 준다.
내게도 고등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수학 문제집을 풀며, 성인이 되면 꼭 하고자 꿈꾸었던 일들의 목록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일들의 세계가 펼쳐지면, 그 욕구가 맞물리며 가슴이 설렌다. 이렇게 나의 욕구를 찾아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나의 어떤 결핍을 해소해나가는 과정은 내게 빛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커리어는 성공을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이런 빛나는 순간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