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서랍 속에 사표를 놓고 산다.
는 옛말은 변한 것 하나 없이 우리는 여전히
늘 마음속에 사직을 꿈꾼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은 좋아졌지만 변하지 않는 근로자의 삶.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더 잘하게 되었어도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서 행복하게 되었어도 늘 고비라는 녀석이 찾아온다.
하물며 하기 싫은 일을 해내야만 하는 상황이란 정말이지 끔찍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이직이나 창업이라는 뜨거움보다는 적응과 안정이라는 미지근함에 익숙해졌다.
한 직장을 10년을 넘게 다니면서 그래도 인정받으며 석사까지 마쳤기에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업무는 많아졌고 다양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위 멀티태스킹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한 가지에 깊이가 없는 이것저것 다하는 사람이었다.
이직을 해야 할까? 싶어서 정말 오랜만에 구직사이트를 들어갔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현타라는 것이 왔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이직을 해야 할까?
업무 범위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세부적인데
난 무엇을 잘할까? 무엇을 좋아할까?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면 어떤 조건이 좋을까?
수많은 물음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들어간 구인사이트는 그야말로 외계어로 난무한 어지러운 공간이었다. 그렇게 가끔 힘들 때마다 찾아간 구직사이트는 나에게 또 다른 길이 아닌 막다른 길처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데 한 동료가 갑자기 정말 예고 없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밝고 또 밝은 동료였기에 더 의아해 처음엔 믿지 않았다.
"에이, 거짓말이지? 오늘 만우절인가?."
"아니에요. 진짠데. 진짜예요. 하하하 "
긴가민가한 나의 얼굴에 그녀는 담담히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됐어요. 준비는 오랫동안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잘돼서 ○○자동차 HRD팀에 합격했어요.
여기는 7월까지만 근무할 거예요."
떡볶이를 함께 먹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다. 왠지 모를 부러움과 왠지 모를 부끄러움으로 빨간 떡볶이만큼 내 볼이 상기되었다.
"축하해. 진짜 잘됐네.
어쩜 이직을 해도 엄청 좋은데 들어가고. 정말 잘됐다!"
"사실 작년부터였어요. 제 일도 아닌 것을 바쁘다는 이유로 계속 투입시키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 떨어지고 하다가 우연찮게 이곳에 넣었는데 통과해서 피티도 하고 면접도 봐서 드디어 합격했어요. "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분명 축하하는데 부러웠다.
'연봉도 높겠지?
거기는 바쁘다고 일을 밀어 넣지는 않겠지?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여러 가지 하고 있고 우리 상황이 힘드니 이해 좀 해달라며 달래진 않겠지?'
결과도 결과지만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그녀의 용기와 추진력이었다. 나는 변화의 문 근처에서 용기가 없어 계속 서성이고 뒤돌기를 반복했는데 그녀는 달랐다. 물론 그녀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나와 비슷한 업무를 하며 한 팀에서 몇 년을 소통하였기에 더욱이 비교가 되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용사는 아니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어도 나서서 말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잘한다는 칭찬과 위로로 십여 년을 달려왔는데도 여유보다는 늘 긴장과 불안으로 뒤섞인 회사생활에 요즘따라 회의감이 많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소위 십여 년을 넘게 버텼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는 현실을 턱 하니 마주하니 왠지 마음이 멀미하듯 울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있으니 지금처럼 양해를 못 구할 거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건 힘들겠지.'
'이처럼 좋은 동료들은 새로운 곳에서 또 못 만날 거야.'
안 되는 이유로 버텨온 오랜 세월에 짧고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그 진동의 여파가 용기로 뻗어갈지 또 다른 타협으로 잠잠해질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에 비로소 내 남은 삶, 남은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부러워만 하기에 인생은 짧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앤 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