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꽃다발을 받았다.
' 생일에 장미꽃 100 송이라...
캬아! 얼마나 낭만적인가...!'
라고하고 싶지만 문제는 남편은 지금 쉬고 있고
돈이 나올 구멍은 내가 아는 한 전혀 없다는 것이다.
10월의 결혼기념일에 이어 11월은 내 생일이 있다.
한 번에 퉁치고 싶지만 그러기엔 가깝지도 않은 날짜라
같은 이들과 챙기는 두 번의 기념일이 언제부터인가 부담이 되었다.
기념일... 참 의미 있는 숫자다. 하지만 그 의미를 담는 그릇이 얄팍하면 금세 깨어지고 말듯이 이미 한번 금이 간 내 마음의 그릇이 새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저 나만 아는 흐릿한 흔적이 다른 이들에 보일까 끝없이 불안해하며 살아갈 뿐. 언젠가 나조차 잊어버릴 때가 오겠지 하며 애써 그 흔적을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유난히 빨간 꽃송이들은 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느냐며 더욱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빨간 꽃잎들은 지금이 제일 예쁘다며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꽃들을 보며 흔들리는 내 시선을 그이가 볼까 두려웠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내 고민이 되었다.
'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할까?'
' 대체 이 꽃은 어디서 났냐고 해야 할까?'
웃고 있는 눈과 그렇지 못한 입이 싸우고 있었다.
' 그래, 이제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잖아?
일단 그 마음부터 칭찬해 주자!'
그리고 물어도 늦지 않잖아.
" 와! 웬 꽃이야? 이번 생일은 기대 안 했는데 갑자기 서프라이즈를 하고 그래. 흐음~ 냄새 좋네 이쁘다. 고마워!"
사실하고 싶은 말을 위한 복선이긴 했지만 고마움을 전하니 괜스레 마음이 찡했다.
자, 이젠 팩트를 짚어볼 차례다.
" 근데 돈이 어디서 났어?
아직 일을 안 해서 돈이 없을 텐데..."
라고 말하는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설마 또 빚을 낸 것은 아니겠지?'
' 누군가에게 돈을 꾼 것은 아니겠지?'
이미 학습된 뇌는 무섭게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난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그 이가 나직이 말한다.
" 이쁘지? 당신이 좋아해서 다행이야.
사실 내가 온몸이 아프다고 한 날 있지?
그때 쿠팡에서 알바를 하고 왔던 거였어...
당신 생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반나절 정도 일하고 애 하원 시키러 갔었지..."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며 속으로 생각했다.
' 휴우... 그래, 정직한 꽃이었구나. 그럼 됐어...'
그는 내가 안 좋은 반응이라도 할까 걱정되었는지
계속해서 꽃을 사기까지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쿠팡에서 반나절 일하면 오만 원 좀 못 되는데,
다행히 마음에 드는 꽃이 그 가격이었어.
근데 도착하는 시간을 맞추기가 힘드네.
원래 당신 모르게 도착하게 하려고 한 건데 들켰네..."
하고 멋쩍어하며 어서 빨리 칭찬해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 일이 많이 힘들었겠어. 감동이네 고마워요. "
나는 안도와 고마움 사이에서 살짝 중심을 잃었지만 왠지 이 순간만큼은 고맙고 행복한 마음 그 마음에 집중하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돈으로 주지 왜 금방 시드는 꽃이냐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을 거다. 꽃이든 식물이든 오래 키운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다른 대체재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물류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왜 금방 시드는 꽃을 샀냐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다.
직장을 빨리 들어가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마흔 중반을 향해가는 사람이 단기 알바라니...
누군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겠지.
어디 가서 남편이 아르바이트해서 꽃 100송이 선물해 줬다고 자랑해도 나를 가엾게만 보겠지.
하지만 문득 나라도 이를 다르게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내가 그이라면
하루 반나절을 죽어라 일하고 꽃을 샀는데
나를 보는 그 얼굴이 이미 시든 꽃이라면
내가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을까?하고...
그래, 노동의 대가면 되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쓴 거면 되었다.
100송이의 꽃은 금방 시들지언정 이를 위한 마음씀은 내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겨 두겠노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