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사지 않았는데 입을 옷이 늘었다
옷장의 미스터리
옷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없는 편도 아니다.
평소 보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보니 출근 전날 미리 입을 옷을 고민하고 꺼내두는 습관이 생겼다.
코로나 전에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에 한번 지갑이 잠시 무거운 월급날엔 옷을 사곤 했다. 비싼 옷 하나보다는 소위 가성비가 좋은 옷 여러 개를 구매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교했다. 그러다 맘에 꼭 드는 옷을 발견하고 마무리로 결제까지 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러던 내가 아이를 낳으며 장바구니에 내 옷보다 아이옷을 먼저 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옷에 대한 욕구가 줄었다.
그전엔 옷을 사지 않으면 매일을 같은 옷을 입는 것처럼 기분이 찜찜했고 왠지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았다.
내일 뭘 입을까 하고 보면 하의는 있는데 마땅한 상의는 없고, 옷을 다 입었다 치면 또 마땅한 신발이 없는 것 같고 말 그대로 완벽한 착장을 찾기 어려웠다.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어디 패션쇼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옷 또 입었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왜 그리도 남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가만히 지난 기억 속을 헤짚어보니 넓은 운동장 한편에 외로이 서있는 어린 소녀가 떠오른다. 바로 귀밑까지 자로 잰 듯 똑 단발을 하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내 모습이다.
유쾌한 친구로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던 나는 공부보다 친구들을 웃기려고 학교를 다니던 때가 있었다.
몇 마디 안 했음에도 깔깔 웃음으로 회답하는 친구들 앞에선 마냥 행복했다.
그렇게 유쾌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찮게 학급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친구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는 이유로 나는 소위 은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너무나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어린 내게서 짧은 순간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친구들의 웃는 얼굴이 그저 행복이었던 내게 그 당시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은 매일매일이 견디기 힘들었다.
유난히도 행복했던 학교가 죽어도 가기 싫은 곳이 되면서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아마 그때부터 남의 시선을 많이 쫓았던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 남이 바라보는 나.
모든 친구가 나를 좋아해도 나를 싫어하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나를 탓하는 시선과 말들이 조금이라도 들리면 그간 공들여 쌓은 내 긍정의 탑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적당히 무시하고 넘어가라는 그 흔하고 쉬운 말들이 내겐 외계어라도 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다. 잠깐의 학교 폭력이 나도 모르는 사이 몸과 마음에 얼룩처럼 남아있다는 것을.
슬픈 표정이 탄로 날까 두려워 귀밑까지 한껏 웃는 얼굴로 가장한 피에로처럼 나 역시 계속해서 상처를 가릴 새로운 포장지를 찾았다. 굳이 내 속을 보여주지 않아도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무언의 도구, 언제부턴가 내게 있어 옷은 그런 존재였다.
그러던 내가 반강제적으로 옷을 사지 않게 된 건 우연찮게도 코로나 덕분이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고 가정 경제에도 칼바람이 불면서 자연스레 옷을 사지 않게 된 것이다.
매일 입을 옷을 고민하던 나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적응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더욱 신기한 일은 엔데믹이 선언된 이후에도 쭉 옷을 사지 않게 되었고, 더더욱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옷은 더 많아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간의 내 옷장은 변함이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옷장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옷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왜 안 입었을까?
저건 왜 안 입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옷장 한편에 제쳐둔 옷가지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늘 옷이 없다고 생각한 내 시선으로는 늘 숭덩숭덩 비어만 보이는 옷장이었는데 애정을 가지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미 산지 꽤 오랜 옷임에도 입을만한 옷들도 많았다.
이와 동시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하고.
늘 곁에 있어 망각하기 쉬운 소중한 존재들에 더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착각으로 이미 가진 귀한 보석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이참에 누군가에 보이는 나보다 나만 아는 내 삶의 이야기에 조금 더 귀 기울여 보겠노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