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생일

돼지저금통은 사랑이지

by 메이쩡


" 정말? 엄마 때문에 저금통을 뜯겠다고? "


8살 아이의 눈에는 제법 묵직해진 돼지저금통을 뜯어야 하는 아쉬움보다 엄마를 위한 선물을 사겠다는 기쁨이 더 커 보이는 듯했다. 어디선가 짤랑 거리는 동전 소리를 들리거나 착한 일을 해서 용돈이라도 받을 때면 그저 자신의 저금통에 먼저 넣기 일쑤였다. 툭 하며 쌓이는 동전들을 보며 기뻐하던 아이 얼굴이 어렴풋이 스쳐간다. 농담으로 돼지 저금통의 돈을 조금 써도 되냐고 물으면 아이는 웃으면서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데 그런 저금통을 지금 뜯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진짜 저금통 뜯을 거야? "

" 응, 엄마 생일이잖아. 엄마 선물 사주고 싶어. "


아이의 작지만 단호한 말투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특하면서도 고맙고 한편으로는 아이 본인을 위해 소중하게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엄마의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아이의 선택이니 이를 존중하고 즐겁게 받아들여야지.


아직 돈 세기가 서툰 아이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금세 우리의 도움으로 동전들을 세며 쌓아 올린다. 이 돈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은 크게 와닿지는 못하겠지만 한눈에도 제법 많은 양에 흡족해한다. 무엇보다 아이 본인 소유의 몫이라는 것, 내 것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그 감정을 스스로도 느끼는 듯 그저 싱글벙글해하는 모습이 매우 대견하고 귀여웠다.


총 20,200원. 언제부터 모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가 처음 만든 저금통이었고 처음 오픈한 저금통이기도 했다. 엄마는 그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배부르고 감동적인데 아이의 마음은 이미 분주해 어서 선물 사러 나가자며 갈 채비를 서둘렀다. 편지지도 사서 편지도 써줄 거고 이것도 해주고 싶고... 스포도 이런 스포가 없을 만큼 아이의 귀여운 선물 예고에 이미 가슴 한편이 눈물로 적셔진 느낌이다. 우리 역시 갈 채비를 마치고 우리만의 백화점인 집 근처 다이소로 향했다.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적였고 마침 하나 남은 쇼핑바구니를 잽싸게 챙긴 아이는 의기양양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우리 가족 공동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만 주로 담았던 바구니에 막상 오롯이 나를 위한 것들로 채우려니 쉬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의 가벼운 발걸음에 장단 맞추며 조금씩 둘러보기 시작했고 이내 사고 싶었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기가 담을 거니 엄마는 말만 하라기에 눈으로 집듯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했고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양말, 풋크림, 팩... 그간 사고 싶었지만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나의 욕망 리스트가 어느새 아이의 손에 수줍게 들려 있었다.


계산해 보니 얼추 6천 원 정도가 되었기에 아이에게 이제 됐다며 충분하다며 포장하러 가자고 말했다. 아이는 엄마에게 더 선물하고 싶다며 하나 더 사라며 계속 내 등을 떠민다. 이 모습이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아이의 첫 플렉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게 돌아온 아이는 선물 상자도 본인만의 색깔로 채우고 싶었는지 형형색색의 색연필로 꾸민다. 본인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은 주변에 두고 주인공인 '엄마'를 상자 중간에 대문짝만 하게 크게 썼다. 상자지만 마치 편지지처럼 꽉 채워진 그림들에 열지 않아도 그 마음이 온전히 느껴졌다. 서둘러 주고 싶은데 케이크는 언제 부는지 생일 파티는 언제 할 것인지 연신 질문해 대며 아이의 시간은 그렇게 더디게만 흐르고 있었다.


막상 촛불을 불 때가 되자 엄마보다 빨리 촛불을 끄고,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엄마 얼굴, 편지에 감동하는 엄마의 반응까지 보더니 그제야 느낀 허기에 서둘러 밥그릇에 얼굴을 묻는다.


이를 촉촉한 눈으로 대견하게 바라보는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아이가 잠들자 우리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말한다. 오늘 아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저렇게 작은 아이도 소중한 돈을 모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사고 또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되고 미안하다고... 또 그런 본인의 모습과는 다르게 이렇게나 대견하게 성장해 준 아이가 너무 기특하고 고맙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매년 한 번씩 폭풍우 같은 거짓의 소용돌이가 다녀가면 상처와 빚으로 폐허가 된 마음만이 남았다. 이 폭풍우에 휩쓸리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이 느껴져 매년 이맘때만 되면 즐거움보다는 걱정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래서 남는 건 하나 없이 모든 게 휩쓸려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의 우려와는 다르게 오히려 더 튼튼하고 강하게 뿌리내린 나무가 있었음을. 그게 바로 우리 아이였음을. 늘 가까이 있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소중하게 아끼고 지켜주자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큰 걱정 없이 편안한 생일 아침을 맞았다. 평소 같으면 깨우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오늘따라 기분 좋게 눈뜬 채 화장대 앞에 선 엄마를 향해 연신 미소를 짓는다. 곧 무거운 출근길에 오를 엄마를 위해 마음이라도 가볍게 해 주려는 걸까? 아이의 작은 행동에 감성적인 엄마는 또 한 번 뭉클한다.


무거운 몸을 버스에 싣고 버스 카드를 꺼내려는데 알록달록한 편지지가 보인다. 분명 어제 아이가 나를 위해 산 편지지인데 한눈에도 익숙한 필체의 제법 도톰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예전에 그에게서 편지를 참 많이 받았는데 결혼 전 연애편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고해성사가 담긴 편지였다 보니 반사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분명 장수가 많았는데 몰입해 읽다 보니 금방 읽어 내려갔다. 그 속에는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아쉬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 변화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 모든 빼곡하게 담겨있었다.


그 글들이 공중에 휘발되지 않고 부디 다가올 우리의 미래에 의미 있는 날개가 되어주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응원했다. 생일에 소원을 꼭 하나 빌어야 한다면 모두 올인하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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