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화면 켜진 마음
평소 아이와 함께 있는 평일 저녁 우리는 절대 티브이를 틀지 않는다. 그와 나 모두 티브이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아이에게 집중하자며 암묵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와 실컷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이가 잠들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티브이를 틀었다. 월화수목금 매 요일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을 늘 꿰고 있었고, 하루가 가는 게 아쉬운 듯 잠들기 전까지 시간을 꽉꽉 채워 눈앞의 바보상자에 홀린 듯 빠져들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하루의 노곤함을 달래고 싶었고, 보상받고 싶었으니까.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고 그렇기에 서로의 하루에 대해 궁금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긴 시련을 겪고 나서 새삼스레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 우린 서로의 하루가 그 누구보다 궁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것. 그는 그대로 본인의 거짓말이 탄로 날까 두려워 잠시나마 바보상자를 통해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설마 아니겠지 라는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어떤 흔적이라도 발견할까 두려워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바보상자에 빠져든 채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죄책감으로 나는 불안함으로 매일을 반복했다.
세상엔 몰라도 되는 일들도 많고, 적당히 무시해도 되는 일들도 참 많다. 하지만 그게 내 일이라면 또 우리의 앞날과 관련이 있다면 절대 덮어두고 외면하면 안 되었다.
진실은 늘 그곳에 있었지만 우리는 그 진실을 서로 마주하기 두려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맴돌 뿐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진실의 실타래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늘 그 자리에 있던 진실이 이불을 들추어내듯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 놀라다 못해 뒤로 자빠진 채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이 진실게임의 악역이 되어버린 그는 언제부턴가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당할 일이 없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거라며 내 머리와 몸은 그 환경에 자연스레 적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처럼 보였지만 우리만 알고 있는 그 불편한 진실이 가끔 헛기침처럼 예기치 못하게 새어 나올 때 우리는 늘 같은 반응을 보일 뿐 다시 진실 뒤로 숨기 바빴다.
GPT가 일러준 대로 그는 매일 5분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늘 피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또 그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오늘의 다짐과 함께 매일매일 본인의 감정을 체크한다. 인지행동치료 자체가 머릿속에 인지하는 것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교정하는 것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그때그때 인식하고 기록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가 잠든 후 매일 보던 티브이를 멈추고 앉아 가만히 서로를 응시한다. 잠시 후 그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분홍색 작은 노트를 들고 나온다. 아이가 유치원 졸업 선물로 받아온 문구 세트 속 담겨 있던 그 노트. 아이에겐 아직 쓸모가 없어 홀로 방치되어 있던 그 예쁜 노트가 그의 비밀이 담긴 일기장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의 감정을 기록하고 매일 저녁 그 감정을 글에서 말로 꺼내 함께 나눈다.
" 사실 오늘 면접본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쉽게 불합격했대... 당신한테는 마치 될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이 사실을 얘기하면 당신이 실망할까 봐 얘기하는 게 불편했어... 예전에는 이럴 때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된 것처럼 마치 합격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기도 했는데... 뻔히 들킬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말을 못 하겠는지... 그런데 이젠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서 바로 이야기하는 거야..."
그는 그렇게 오늘 하루 본인만 알고 있었는 불편한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의 몸속에 꽉 찬 검은 형체들이 하나둘씩 토해내지니 일순간 불편해 보였지만 이내 숨통이 트인 듯 편안해 보였다.
예전에는 함께 대화를 해도 편안하지 않았다. 평범한 부부의 대화가 마치 오늘 끝내야 할 과제처럼 느껴졌고 그래야만 소통이 잘 되는 부부라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시선을 쫓았고 정작 보고 싶은 우리의 모습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제는 조금씩 그 대화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늘 다른 곳을 응시하는 듯 갈 곳 잃은 그의 눈은 이제 깜빡일 때를 제외하곤 늘 나를 향해 있다. 어쩌면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을 내면의 깊은 외로움을 이제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인지 그의 말투도 행동도 조금씩 편안해 보였다. 언젠가부터 그와 함께면 늘 인내라는 숙제가 따라다녔던 내게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요즘 이래저래 피곤하고 힘들었다며 나도 마음이 힘들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그 푸념 섞인 한마디가 평범하게 흘러나왔다.
누구보다 내 감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그와의 갈등이 반복되면서부터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마치 욕심처럼 느껴졌다. 눈앞에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과제 앞에 나의 평범한 고민쯤이야 티도 안나는 티끌같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예전과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 혼자만 고치면 그 혼자만 회복하면 우리 가정은 아무 일 없을 거야 라며 늘 바라기만 했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함께하지 않으면 그저 제자리만 맴돌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방향이 아무리 맞다한들 함께 노를 젓지 않는다면 그 배는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의 행동이 이제와 정당화될 수 없고 그렇게 허투루 보낸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도 안다. 많은 이들은 가장답지 못하다며 비겁하다며 그를 손가락질하며 책임을 묻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겐 우리의 지난 시간만이 가십처럼 오르내릴 뿐 달라질 내일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조금씩 오늘 지금 당장의 행동으로 옮겨보자 다짐한다. 바보상자 대신 선택한 매일의 대화가 언젠가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길 손꼽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