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오늘이었어야 했을까
오늘도 수고했어. 쉬어.
짧고 묵직한 한마디를 건네고 당신은 방으로 들어갔어.
우리는 늘 아이를 재우고 TV를 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함께 달래곤 했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크게 의미 있는 활동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꾀고 있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보냈으니까.
문득 당신이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처음엔 이렇게 당신과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는 게 낯설었는데 어쩌면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고. 늘 당신이 나에게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나의 의심과 추궁도 이 제약된 공간이 주는 일종의 관성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어.
무엇이 되었든 이 쉼과 여유를 기분 좋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우리를 가깝게 하기는커녕 더욱 멀게 한 것 같아. 마치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와 선생처럼 나는 관리자로 당신은 학생으로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우리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말이야.
이 공간에서 우리는 행복한 모습이어야 했어. 나는 의심으로 불편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어도 되었을 텐데 나에겐 당신의 침묵이 더욱 무겁고 무섭게 느껴졌거든. 또 거짓일까 봐 두려웠고 당신 입으로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 안심이 되었어. 속으로는 의심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을지언정 당신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나 봐. 그때 당신이 거짓보다 잠시 침묵을 택했다면 더 나았을까?
찝찝함으로 얼룩진 감정을 안은 채로는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어. 당신을 붙잡고 거짓이든 사실이든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그게 무엇이든 믿고 싶었어. 그리고는 그 믿음을 수면제 삼아 잠들곤 했지.
우리가 잠시 정서적 거리를 두자고 이야기하면서 처음엔 역시 낯설고 불안했던 건 사실이야. 늘 같이 있던 이 공간에 오랜만에 혼자였으니까.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우리는 함께였어. 바로 옆방에 있는데도 웃으며 부를 수 없는 지금의 거리와 온도를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됐어. 하루 이틀 이렇게 시간이 지나더니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네. 일주일 정도 이렇게 지내다 보니 문득 오늘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당신도 나도 일찍이 우리 감정에 쉬는 시간을 좀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나도 결혼이 처음이고 아내도 엄마도 처음이지만 세상과 부딪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데 왜 당신은 그렇지 못할까.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을까.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데 내가 몰라봤을까. 왜 나를 아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왜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지 않을까. 적어도 내 삶의 기준과 방식의 프레임으로 본 당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아주 가까운데 또 아주 먼 사이 같기도 했어.
당신과의 하루가 당신과의 감정이 늘 좋게 매듭이 지어져야만 내 하루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어. 잠깐의 불편함이 마치 계속될 것만 같아서 그 불안이 싫었어. 이제 와서 그 잠깐의 불편함을 견뎌냈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들기도 해.
하지만 후회만 하기에 아까운 인생이잖아. 우리가 편안해야 아이에게도 안정을 선물할 수 있겠지. 처음엔 이 거리가 의식되고 부자연스럽고 힘들었지만 나름 나와 우리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 그간 어떤 감정을 서둘러 매듭짓느라 왜곡되었을지 모르는 나 자신을 이번 기회에 한번 만나봐야겠어.
아직 삶의 매듭을 짓기도 너무나 이른 만큼 이 관계의 매듭도 조금은 느슨하게 가져가 보려고 해. 꼭 매듭을 지어야만이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고쳐 메고 싶을 때 다시 멜 수 있는 여유정도는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