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쩡 Feb 08. 2022

<지구의 절반>

by 에드워드 윌슨

이타주의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이처럼 와닿을 때가 있었을까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때야말로 가장 필요한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건 이로 인한 남들의 '시선''낙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타주의 왜 자연에는 적용하지 않을까요?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 중 하나는 인간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실이었습니다.


수많은 생물들이 자연에 적응하고 쇠퇴하고 또 진화하는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거쳐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존재.

우리는 수백만 생명체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같이 이 지구를 살아가는 동반자일까요 아니면  스스로를 신과 동일시하기나 한 듯 이 지구를 독차지하려는 무서운 포식자일까요?


인간은 늘 자연 앞에 무기력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의 힘을 인정하는 데에는 아직 너무서툴어 보입니다.

무언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깨닫게 그제야 서둘러 수습하려고 하는 이미 익숙해진 탓도 겠지요.


하지만 그 누가 되었든 단연코 예외가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연을 파괴로부터 지키는 일, 지구 상의 멸종해가는 생물들의 터전을 보존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나무 한 그루이겠지만, 그 나무 한그루 곁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교합을 한 그 결과로써 비로소 우리 눈에 이는 것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미래의 후손을 위해 지구의 절반을 자연에게 돌려주자고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류, 미생물 등의 역할에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한 나머지 황폐화된 땅 밭으로 일구려 하고, 흐르는 강은 막아 댐을 만들려고 합니다.


좁은 공간, 늘어나는 사람들, 발전하는 기술들로 인간의 영역은 점차 늘어나는 반면 어쩌면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지구에서 살았을 그들의 설자리 조금씩 밀어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변명만 계속 늘어놓은 채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지구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안된다고 지금이라도 우리를 지켜달라고 칩니다.


과연 인간에게 자연을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요?

인간은 신이 아닌데, 진화의 꼭대기에서 온 지구를 손에 들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인류세에 대한 잘못된 개념만을 강조하면서 연이 오히려 인류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잘못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우리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억지로라도 짬을 내어 와 자연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미래 후손들을 위해서 지구의 절반을 이 땅에 공존하는 다양한 생물들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겨주어야 한다고.


그게 과연 가능할까?

조금이라도 고개를 갸웃하는 모든 이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제대로 된 인식과 인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방구석 미술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