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깬다.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이 아니냐고 반문할 테지만 그들이 먹이를 찾고 짝을 부르고 영역을 지키느라 내는 소리는 꽤 소란스럽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리지만,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날에 들을라치면 어느 무명 로커의 샤우트처럼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들은 한결같을 진데 내 심상에 따라 같은 소리도 다르게 들려오는 것이다.
간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여름 바람이라 을씨년스럽진 않았지만 산 아래에 있는 아파트의 발코니 문이 춤을 추듯 들썩거렸다. 문을 닫고 커튼까지 꼭꼭 여며보았지만 바깥의 기세는 고스란히 거실 안까지 침범해 들어온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힘센 장정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바람에 그네들은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몸을 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무슨 연유인지 도통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스탠드를 켜고 살살 발코니로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왜바람 소리만 온 사방에 가득하다.
여름은 꽃을 보러 가는 계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름에 더 많은 꽃들이 핀다. 특히나 산수국은 여름 꽃의 절정이다.
산수국은 꽃 가장자리에 네잎클로버를 닮은 예닐곱 개의 꽃이 피는데 이 꽃은 진짜 꽃이 아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가짜 꽃, 즉 헛꽃이다. 당연히 이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불두화와 함께 절집에 많이 심어져 있는 꽃인데 그렇다고 산수국이 가짜 꽃만 피는 것은 아니다. 헛꽃에 둘러싸여 볼품없이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는 것이 진짜 꽃, 즉 참꽃이다. 꽃 하나하나가 암술과 수술, 꽃잎으로 이루어져 꽃으로서의 면모는 갖추고 있지만, 작고 보잘것없으니 벌과 나비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할 터. 그래서 가장자리에 헛꽃을 만들어 내어 벌 나비를 유혹한다. 영리하다고 해야 할지,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오묘한 자연의 이치가 기발하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산수국은 처음에 푸른색에서 보라색, 자주색까지 다양한 색깔로 변신해서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한 달 가까이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들의 기말 시험 준비로 바빴다 하더라도 문장 한 두 줄 쓸 시간이 없었을까. 예전에도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하얀색의 바탕화면에 깜빡이는 커서가 낯설게 보일 때 말이다. 가슴속에 담아두면 될 것을 굳이 조악한 단어로 문장을 만들고 문단을 쌓아, 글로 내어 놓을 필요가 뭐가 있나 회의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멋부리듯 고뇌하며 피워내는 문장이 허영이다 싶어 백 스페이스를 사정없이 누르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십여 년 전 수필 문예지에 내가 쓴 <강 깊은 마을>이란 작품이 실렸을 때,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강의를 하는 교수님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등단작 외에 처음 발표한 수필이었는데, 아마도 내 수필로 수강자들과 수업을 할 모양이었다. 잘 읽었다는 인사와 함께 몇몇 문장들의 의미를 작가에게 듣고 싶어 전화를 하셨다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당황스러웠고 그저 내가 좋아 쓴 글 노트북에 모셔놓지 않고 발표를 하게 되면 더 이상 내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이 되는 모양이라고 그때 생각했다. 그 뒤부터는 멋 모르고 내 멋에 취해 쓴 글을 내어 놓을 수가 없어서 다작을 하지 못하는 수필가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헛꽃을 지금보다 더 많이 피워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국은 생존을 위해서 헛꽃을 피우고, 참꽃은 이 헛꽃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헛꽃이 꽃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지금도 헛꽃을 피우고 있을까. 헛꽃을 이렇게 피우다 보면 내 안의 참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기나 할까. 요즘 글 한 줄 맺기 위해 참글 인양 헛글을 수십 송이 피워내는 나의 욕망에 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린다.
언제부터 우리 동네에 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올해 들어 첫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이 규칙적인 음보로 서글프게 우는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면 먼 전생의 기억 같은 것이 가슴에서 파도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아 놓고 가짜로 슬퍼하는 헛울음 같이 들린다.
나는 오늘 또 한 송이의 헛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