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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26. 2022

음식은 기억이다(Feat. 수제비)

음식은 기억이다. 혀끝의 기억이고, 코끝의 기억이다. 또한 추억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 되기도 한다. 음식에는 시추에이션이 많이 작용한다. 이글거리는 땡볕이 아스팔트의 마지막 수분에 스트로를 내리꽂는 한 여름,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목으로 넘길 때의 그 충만함을 무엇에 비유할까. 추운 겨울 포장마차에서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어묵 국물을 호호 불어 가며 먹는 맛은 또 어떠한가.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에 대한 앙케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음식이 동동주와 파전이다. 유독 비가 오는 날에는 부침개 생각들이 나는 모양이다. 비는 마치 아랍의 여인네들이 쓰는 차도르처럼 바깥세상을 차단시켜 준다. 해서 앞에 앉은 사람이나 사물에게만 집중을 할 수 있게 한다. 비단 음식 맛 때문이었을까. 동동주 몇 잔에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발그스레한 볼을 마주하며 나눈 정에 취해 함께 곁들인 음식은 신들의 만찬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비 오는 날 생각나는 음식을 꼽으라면,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수제비다.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비만 오면 창문가에 앉아 비 구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특히 해거름 노을이라도 질라치면 절절하게 전생의 기억처럼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복받쳤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비를 좋아하면 외롭게 살 팔자라며 늘 혀를 끌끌 차셨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머니도 비만 오면 구수하게 멸치 국물 우려내어 숭덩숭덩 애호박 감자 썰어 넣고,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넣어 수제비를 끓여 주시곤 하셨다. 내게 퉁을 놓으면서도 실은 나름대로 비를 즐기셨던 게 아닌가 싶다. 후후 불어 가며 따끈한 수제비를 한 그릇 먹고 나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노곤하고 뭉클해졌다.

 

오늘처럼 비가 내려 눅눅한 날이면 더욱 그 맛이 그리워지곤 한다. 어머니 손맛을 흉내 내어 만들어 보지만 어디 그 맛이 날까. 그때처럼 비는 내리고 나는 또 이렇게 창가에 앉아 있지만, 수제비를 떼어 내는 손길을 멈추고 딸에게 들킬세라 창 밖의 비를 흘깃거리시던 엄마가 없으니…….


사람은 음식이 아니라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상황에 따라 기억이란 어떤 방향으로든 채색되고 덧칠되기 마련이지만, 그 추억들은 현재를 태우는 연료가 되고 나는 그 기억이 일으키는 힘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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