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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30. 2022

아버지와 커피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커피다.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어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시간 동안은 이대로 침대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기도 하고, 오늘 하루 살아내야 할 거리를 내다보기도 한다. 또 가끔은 가물거리는 옛사랑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방을 나와 아직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커피머신 스위치를 켜고 폭폭 거리며 커피가 내려오는 과정을 지켜본다. 아메리카노 한 잔 내리는 짧디 짧은 이 시간도 참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주로 낮에는 캡슐머신을 쓰지만 아침에는 드립으로 내린다. 그래서 시간이 더디다. 커피 향이 올라오고 영원할 것 같은 순간을 지나 막 뽑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나에게 상처 주었던 모든 이들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주술 의식과도 같은 커피 내리기는 아침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벌써 열흘째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랫동안 피와 이별 중인 것이다. 사람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커피는 그렇지 않다. 매일매일 더 간절하다. 건강검진 때마다 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도, 큰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공복에 마시는 모닝커피를 끊을 결심을 해보진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 통증이 생기면서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지금 나는 나름 눈물겨운 대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중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께서 남미로 출장 가셨다가 사 오신 브라질 산토스 커피로부터 장구한 커피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때는 에스프레소 머신이니 피메이커니 이런 것은 없을 때였다. 어딘가에는 있었겠지만 우리 집에는 없었다. 집에 있는 맥스웰 커피, 그 쓰디쓴 커피를 굳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기호에 대 전환점을 마련해준 사건, 아버지가 출장길에 원두커피와 모카포트를 사 오신 것이었다.


모카포트에서 커피를 추출하는 일련의 과정은 내가 아침마다 행하는 의식보다는 조금 더 손이 간다. 먼저 보일러 부분에 찬물을 압력추에 닿을 듯 말 듯 넣는다. 그 보일러 위에 바스켓을 올려 커피가루를 평평하게 담는다. 그다음 커피가 담길 컨테이너를 결합시키고 조심스레 가스불에 올린다. 불은 모카포트의 바닥면 크기와 비슷하게 조절한다. 조금 기다리면 치지직거리며 커피가 컨테이너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뒤 증기를 뿜는 소리가 날 때 불을 끄면 에스프레소는 완성이다.


미리 데워 설탕 한 스푼을 넣어 놓은 컵에 막 뽑은 에스프레소를 조심스레 따라 젓지 않고 그대로 마신다. 그러면 쌉쌀한 커피 한 모금 끝에 설탕의 단맛이 올라와서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아버지의 커피 마시는 법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마셔보았으나 어린 내 입맛엔 너무나 써서 기겁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차가운 우유를 내 잔에 부어 주었다. 그것이 지금 마시는 라테였던 것이다. 애한테 커피를 마시게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부녀는 아침마다 이 의식을 치러냈다. 일요일엔 커피에다 프렌치토스트를 곁들여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브런치를 먹기도 했는데 평일과 달리 여유 있게 '일요일 오전 아버지와 나만의 티타임'이 되었다.


당분간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한 첫날은 두통과 안구통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다음은 졸음이 쏟아졌고, 아무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이면 커피를 실컷 마실까 싶기도 했다. 얼마나 카페인에 중독되어 있었으면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까 싶어 새삼스레 자기 성찰의 시간도 가져보게 된다.


삼사일쯤 지나면서부터 두통은 웬만큼 사라졌고, 두통약을 먹으면 괜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기운이 없고 몽롱하다. 그동안 왜 중독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커피를 즐기지 않고 의무처럼 많은 양을 무의식적으로 찾았을까. 생각해보면 내게 결핍을 부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애정결핍일  수도 있고  원래 영혼의 빈터가 넓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결핍의 반작용으로 커피에 대한 욕구의 쏠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KTX가 있기 전엔 새마을호가 제일 빠르고 좋은 기차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그 기차 식당칸에서 아버지와 커피를 마시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창밖으로 흐르는 무연한 풍경을 보면서 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들었고, 그 당시 내가 흠뻑 빠져있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구름처럼 흘러 다니던 시절의 내 재잘거림을 그저 들어주는 것뿐이었는데도 자잘한 고민은 해결된 듯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잠시 했었고, 그날의 내 일기장엔 아버지와 나눈 환상의 자락들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달은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나는 아버지의 간호를 전담했고, 보호자 베드에서 자고 있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매일 아침 복도 자판기에서 모닝커피를 뽑아다 주셨다. 당신은 마시지 못하니 내가 마시는 것으로 대리 만족했던 것인지, 오래전 일요일의 티타임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 이 모닝커피 한 잔으로 충분했고, 버틸 수 있었고, 아버지를 의연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커피가 나를 지키는 수호신인양 받들기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와 나눈 시간을 마시며 나는 그리운 무엇인가를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남은 사람의 일부분도 함께 죽는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결국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건 아마도 '저쪽'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그저 버릇처럼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한 번 생겨난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심장에 영원히 자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마시지 못할 커피를 버릇처럼 내렸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숨어있는 짓궂은 운명의 지뢰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기다릴 땐 오지 않고 돌아서면 붙잡고 매달리면 떠나는 인생의 장난들을 쿨하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몽글몽글 피어나는 봄꽃들이 얼음꽃처럼 느껴지는 한기를 녹여준 것도 한 잔의 커피 때문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해 몽롱해진 정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참 평화로워 보인다. 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와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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