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십중팔구, 아니 십중구점구는 울 때 "엄마!"하고 울지만, 그 아인 "아빠!"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요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오호! 신박한데? 내가 왜 진작 저 생각을 못했지?'였다. 왜냐고? 난 아빠가 좋았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엄마가 싫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빠를 찾으며 울던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란 존재가 없었다. 아빠밖에 없었으니까 "아빠"하고 우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울 때마다 "엄마아아"하고 우는 것이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꼬마의 냉철한 이성은 '자! 지금부터 너는 울 때마다 "아빠아"하고 우는 거야.'라고 세뇌를 시켰지만, 정작 울 때는 냉철한 이성이 발휘되지 않고 멍청한 본성이 또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분했다. 그리곤 다음엔 꼭 아빠를 부르며 울어야지 다짐했다.
이쯤에서, 엄마가 왜 싫었나 생각해 본다.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빠를 좋아하는 아이였으니까 반대로 엄마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영문학, 나는 국문학을 전공한 것만 보더라도 아빠와 나는 쿵짝이 잘 맞는 부녀였고, 하나에서 열까지 엄마는 내가 관심 있는 것엔 무덤덤했다.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예를 들면 어릴 때부터 옷을 만들어 입히고 분신처럼 애지중지 하던 바비인형을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유로 사촌동생에게 몰래 줘 버린다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가 사다주신 내 보물 소니 카세트를 누군가에게 들려 보내는 식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분했던 마음에 기억을 왜곡하고, 조금 더 나에게 유리하게 기억을 조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여름 무렵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큰 비가 내렸다.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나왔는데 운동장에 물이 들어와 찰박거렸다. 큰 비에 교실 입구마다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로 가득했다. 아무리 고개를 빼고 찾아도 우리 엄마는 없었다. 이 큰 비를 뚫고 혼자 어떻게 가나 싶어 울음이 터진 것은 당연했다. 막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저 멀리 운동장 반대편 끝에 아빠가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온통 엄마들 투성이니 민망했던 듯 그리 멀리 떨어져 계셨다. 그때의 안도감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날듯이 뛰어가 아빠 품에 안겼다. 아버지는 늘 나의 멘털이 나갈 타이밍에 내 눈앞에 계셨다. 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아빠를 잘 찾는 아이였다. 엄마는 늘 나의 주위엔 없었고 계모가 아닐까 어린 마음에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30년 전 아버지가 보내주신 크리스마스 카드를 발견했다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해묵은 숙제인 벽장을 정리한 것이 사달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모은 친구들의 편지함을 발견했다. 하나하나 읽어보며 추억에 젖는데 맨 밑에 깔려있던 30여 년 전 아버지께서 보내신 편지 한 통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보낸 거였다.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그 오랜 세월과 수많은 이사에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낡은 봉투에 쓰인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씨를 보는 찰나의 순간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슬픔은 더 명료해졌다.
'외로울 땐 경쾌한 클래식을 들을 것,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플 땐 비트가 강한 록음악을,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으면 그윽한 첼로 협주곡을 들어라.' 어느 상식적인 사람이 쓴 책에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음으로써 일리가 있긴 한데, 상식이란 게 때론 독성을 띄고 있어서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또 끈끈이처럼 정수박이에 달라붙고, 수입 건전지처럼 강하고 오래가기 마련이다. 상식의 또 다른 면일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슬픔은 더한 슬픔으로, 외로움에는 더한 외로움으로 맞서야 한다. 피한다고 잊어지나? 고개 돌린다고 안 보이나?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안다. 지독한 슬픔에 몸을 완전히 내맡긴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경험을. 외로움을 왜 달래야 하며,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보고, 또 들뜬 마음을 굳이 가라앉힐 필요가 무에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힘든 일들의 해결은 극에 있다. 슬픔도 아픔도 결국 인수분해를 해 보면 극과 끝으로 나누어 떨어진다. 그 속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에서 무연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뛸 듯이 기쁠 때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닥칠 것처럼 온종일 떠 있자. 음악도 비트가 아주 강한 걸로 선곡하고 영화는 아주 경쾌한 액션이나 스타일리시한 세미 액션으로 골라야 제격이다. 반대로 슬프고 외로울 땐 죽을 만큼 슬픈 영화와 음악을 골라 크리넥스 상자 오른쪽에 휴지통 왼쪽에 끼고 울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뜻하지 않은 9월의 크리스마스. 아빠, 나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