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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14. 2022

하얀 상처

시간이 내겐 약이 아니더라

          

밤 열 시, 창을 닫으려다가 잠시 바람을 느낀다. 군청색 하늘에 하얀 달이 동그마니 솟아 있다. 그 아래 은빛의 세례를 받고 있는 화단이 고즈넉해 보인다. 그 평온함 속에 하루가 다르게 꽃잎이 벌어지고 있는 목련 한 그루가 서 있을 게다. 어제도, 오늘도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내 눈 속으로 차오르는 그 선연한 빛깔과 해낙낙한 무게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목련은 그저 피었을 뿐일 텐데, 내 가슴은 '쿵'하고 소리를 낸다. 그 철렁함 속으로 봄이 되면 만나는 낯설지 않은 쓰라림이 번져간다.


삶은 누군가와 상처를 주고받으며 걷는 길이다. 인생의 한 지점에서 만나는 상처는 생을 접고 싶을 정도로 치명적이기도 하고, 가벼운 타박상처럼 시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감기처럼 가벼운 것이든,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 같은 상처든 누구나 한 가지쯤의 아픔은 감내하면서 살아간다. 세속을 끊고 모든 것을 초월한 성인이 아닌 이상 이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굴레일 듯하다. 이런 상처와 고통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 역시 다르다. 상처가 마치 훈장이 라도 되는 양 자랑스레 드러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보여서는 안 될 치부인 듯 꼭꼭 숨기고 살아가기도 한다.


아버지께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던 날은 담장 위로 넘어온 옆집의 백목련 가지에 첫 꽃망울이 터졌던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징조였을까? 우리 집도 아닌 옆집 담장에서 건너온 꽃이 그렇게 눈에 확 들어오다니……. 큰 증세가 없어 가벼운 위염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갔던 병원에서는 암이 췌장까지 전이가 되어 손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동안 꽤 통증이 심했을 텐데 왜 빨리 병원을 찾지 않았냐는 의사의 질책도, 석 달 정도의 여유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도 어느 먼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같았다. 혼자 들어갔던 진료실에서 허청허청 걸어 나왔다. 그리고 대기실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희끗한 뒷모습을 마주 한 순간,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내 안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뜨거운 불이 목구멍을 통과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에는 속지 않지만 큰 거짓말에는 잘 속는다고 한다. 어떤 거짓말은 너무나 허황되고 논리적이지 못해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옳고 그름이나 논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비논리적이고 허황된 것일수록 호소력을 지니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께 위궤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동생과 친척들에게도 비밀을 지켜 줄 것을 당부에 당부를, 다짐에 또 다짐을 받았다.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가 무심코 사실을 말해버릴 것 같아서 아버지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의심하시지 못하도록 위장약과 진통제를 처방받아 드시게 하면서 실낱같은 플라세보 효과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거짓말은 향기의 속성과 닮아 있다. 때로는 그 황홀한 향기에 몸을 떨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치명적인 독이 감춰져 있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거짓말은 변종 바이러스처럼 독해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남은 생애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거짓말이라는 독향에 취해 휘청거렸다. 급기야는 나의 거짓말이 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사이에 하늘 향해 도도하게 솟아있던 옆집의 백목련 꽃망울들은 숨죽여 가만가만 피었다가 졌고, 나의 거짓말은 그 후로도 여덟 달 동안 계속되었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나는 점점 말이 많아졌고, 아버지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땐 이미 잘못된 대로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나는 잘못됨을 껴안았다. 껴안고서 점점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끝은 있었다. 목련나무의 잎마저 떨어지기 시작하던 그 해 늦가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아버지로부터 빼앗았던 나의 거짓이 상처로 돌아와 이렇게 오랫동안 남을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살아가다 보면 숨길 수밖에 없는 비밀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보태야 하는 경우와 맞닥뜨린다. 모르는 것이 약인지 아니면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에 다가가는 게 현명한 것인지 누가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최선이란 미명 아래 쌓아 놓은 크고 작은 거짓들이 명치끝에 걸려 욱신거린다.


창밖에는 하얀 상처를 매단 목련이 서 있다. 시간이 내겐 약이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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