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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22. 2022

자화상, 쓰다

나는 누구인가?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린다. 고흐처럼 강박에 가까운 자기 학대를 표현하기도 하고, 프리다 칼로처럼 잔인한 운명 속에서 희망을 그리기도 한다. 에곤 쉴레처럼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몸을 붓으로 난자해 불안과 우울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공재 윤두서처럼 화폭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강인한 기개를 그려낸 이도 있다. 모두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내면으로 몰두한 결과물들이다.


시인들도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를 즐겨하는데,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자기 연민을 토로하고, 서정주는 자신이 종의 자식임을 감추지 않고 헐떡이는 수캐처럼 생명을 이어온 것을 고백한다. 최승자는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어둠의 자식 뱀이라 칭하면서 사악하지만 꿈을 꾸는 희망을 노래하기도 했다.


소설가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 쓴 자전적인 소설을 자주 세상에 내어 놓는다. 신경숙은 <외딴 방>의 서두에서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박완서 소설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목도한 광경을 증언해야 하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지운채 <나목>을 필두로 <엄마의 말뚝>을 비롯한 많은 자전적 소설을 써 나갔다.


모든 문학이 작가의 체험과 인생을 반영하지만 에세이는 글쓴이가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직접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말을 건넨다는 것에서 진정한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이다. 시는 언어 자체가, 소설은 구성과 서사와 문체로, 에세이는 이 모든 것에 진솔한 아름다움을 더해야 한다. 그리고 자아를 관조하고 반추한 사색의 결과물를 내어 놓아야 한다.


런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특별함을 포착하기란, 즐거운 일 속에서 아픔을 건져 올리기란, 분노를 용서로 다스리기란, 눈물 속에서 미소를 길어 올려 모든 이가 공감할 사유를 끌어내기란 철인(哲人)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법이다. 또 읽는 이가 거북스러워할 자기 미화와 접시에 담긴 물보다 얕은 지식의 자랑, 조탁한 문장으로 치장하여 독자의 눈을 속이고 싶은 욕망과도 싸워야 한다.


자신을 끄집어 내는 행위는 때론 부끄럽고 민망하며 외면하고 싶은 것 투성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지난한 일을 대체 왜 하고 있는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에세이스트다. 문장으로 나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에세이스트가 되었다. 자신을 그리면서 사는 삶은 현상과 본질을 오가며 치열하게 사는 것인 동시에, 이쪽과 저쪽 모두에서 자기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본질을 그릴 때는 현상에서 떨어져 있어 고독하고, 현상에서는 본질을 생각하기에 또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기껍게 홀로 여행하기로 한다. 비행기가 아닌 완행열차를 타고, 도로 표지판밖에 볼 수 없는 고속도로 대신에, 누런 먼지 가득한 황톳길을 걷기로 한다. 바닷가에 서면 사진기를 들지 않고 첨벙첨벙 물가로 들어설 테고, 호젓한 길에서는 풍경에 귀를 기울이며, 어둠과 낭만의 두 얼굴이 교차하는 밤길을 걷기로 한다.


나는 자화상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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