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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07. 2022

주인공은 스누피가 아니라고!

제주 '스누피 가든'에서

알다시피 찰스 M. 슐츠가 그린 만화 피너츠의 주인공은 스누피가 아니다. 스누피는 주인공 찰리 브라운이 키우는 비글 종의 개일뿐이다. 그런데 찰리 브라운은 몰라도 스누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주에는 아예 대놓고 '스누피 가든'이 있다. 이런 주객전도에 가뜩이나 소심한 찰리 입장에선 OTL이 아닐 수 없다.



찰리 브라운은 매일 지기만 하는 야구팀의 감독이자 투수이다. 누구보다 이기고 싶지만 팀원들은 외야로 날아오는 공을 보며 '왜 잡아야 하지?'라고 말해서 찰리를 좌절시킨다. 걱정하는 하는 것이 걱정인 찰리는 연날리기를 좋아하지만 연을 잡아먹는 나무에게 늘 빼앗기고, 그의 애견인 스누피는 자기애에 빠져 찰리의 마음을 몰라준다. 그렇지만 찰리의 최대 고민거리는 빨간 머리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빨간 머리 소녀에게 말 걸지 못하는 건 그 소녀는 대단하고 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야. 만약 내가 대단하고 그 소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난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을 거야. 아니면 그 소녀가 대단하고 나도 대단하다면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겠지. 그 소녀가 아무것도 아니고 나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겠지. 하지만 그 소녀는 대단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말을 걸 수 없는 거야...



스누피는 찰리가 키우는 애완견으로 저녁 식사시간을 제일 좋아하는 비글이다. 식사시간이 되면 찰리에게 자기 밥그릇을 가져다주면서 팁을 달라고 하기 일쑤다. 그리고 식사하기 전 언제나 신나게 춤을 춘다. 스누피의 꿈은 소설가인데 늘 빨간 집의 지붕 위에 타자기를 올려놓고 소설을 쓰거나 잡지의 기사를 쓴다. 기사의 제목은 '무능한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따위다. 늘 찰리보다 돋보이고, 그의 약을 올리지만 누구보다도 찰리 브라운을 사랑한다. 그리고 철학적인 대사도 종종 읊어대는데 비서인 노란색의 우드스탁에게 주로 말한다. 사실 우드스탁의 말은 스누피만 알아들을 수 있다.


인생이 그래... 네가 알람을 여섯 시에 맞추면, 벌레는 다섯 시 반에 맞추는 거지.


피너츠 친구들의 리더 격인 루시는 까다롭고 괴팍하다. 늘 동생 라이너스와 찰리를 괴롭히지만 친구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싶어 상담 부스를 열기도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상담료로 5센트를 받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은 피아노를 치는 슈뢰더를 짝사랑한다는 것이다. 슈뢰더와 나란히 앉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선언한 순간, 슈뢰더가 자신은 이제부터 바이올린을 할 거라고 말해도 절대 좌절하지 않는 루시.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고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다.


텔레비전에서 누가 그러는데,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대. 말도 안 돼! 내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어! 나는 긍정의 힘이란 말이야! 내가 세상에 있는데, 어떻게 나빠질 수가 있어? 내가 태어난 다음부터 세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데!



제주 스누피 가든은 오히려 어른들의 놀이터다. 요즘 아이들은 만화 피너츠를 스누피 캐릭터 정도만 알고 있어서 그런지 스누피 가든에는 어른들이 더 많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구경온 어른들은 한여름 더위도 아랑곳없이 꽤나 들뜨고 즐거운 눈치다. 나도 어린 시절에 피너츠의 캐릭터들이 그려진 예쁜 문구를 원 없이 가져보지 못했던 걸 복수라도 하듯, 기념품샵에서 한아름 사들고 돌아온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것은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대부분) 내돈내산을 할 수 있다는 것 딱 하나가 아닐까?




한때 유행하던 노래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를 외치며 누구나 청운의 꿈을 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몇 년만 지나면 한결같이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어!'라며 통곡할지언정 그때 바라보던 하늘은 정말 장밋빛이었다. 그 푸르렀던 꿈이 함정이라는 사실은 12시 종이 울린 후 다시 초라한 누더기 옷의 재투성이로 돌아간 아가씨보다 훨씬 비참하고 쓰리다.


삶은 태엽시계처럼 앞으로만 감기고,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시계의 부속마냥 서로를 조이고 맞물어 질서와 균형을 잡는다. 내가 있어야 세상이 굴러간다고 믿고 싶지만, 나의 빈자리는 이내 누군가로 채워지고 세상은 내가 없어진지도 모른 채 봄날만큼 무심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끌어가지 못한다고 좌절하지 말자.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주인공은 따로 없다.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공 역을 맡았을 뿐이다. 


다만, 내가 맡은 역할이 다른 이보다 조금 더 멋진 역할이었으면..싶은 욕심 정도는 부려도 괜찮겠지. 물론 그 역할을 의미 있고 아름다운 배역으로 만드는 것은 몫이지만.


"인생은 어려워. 그렇지 않아?"
"그래, 어려워."
"하지만 난 새로운 철학을 개발했어. 오늘은 오늘 몫만큼만
두려워하는 거야!"
- 찰리 브라운 -


#스누피 가든 #피너츠 #스누피 #찰리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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