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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06. 2022

마침표

"문장의 끝을 나타내는 구두점인 마침표는 먼지 한 톨 만한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은 글씨의 체계를 확립한 주역으로 찬양받아 마땅하다. 마침표가 없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영영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표는 하나의 생각이 완결되었음을 알려주고 결론이 내려졌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마치 나폴레옹처럼 몸집은 작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당당함을 가지고 있다. 이 작은 점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언젠가는 반드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끝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 녀석이 고민에 빠졌다. 수행평가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던지 내게 도움을 청했다. 고민의 내용은 자신의 묘비명을 써오라는 것이었는데, 어느 누구라도 고민을 꽤나 해야 함직한 과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에 이른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아흔이 넘게 사는 이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 생명의 유한함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슬픔 속에서 장례를 치르고 대부분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운다. 그 비석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쓰이게 되는데 그것을 묘비명이라고 부른다. 묘비명은 무덤 주인에 대한 꾸밈없고 진실한 기록인 셈이다. 


서울 합정동에 가면 외국인 묘지가 있다. 서양인들의 묘지는 우리네처럼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의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다. 이 외국인 묘지도 도심의 복판에 있는데 한때 가까운 곳에 있어 두어 번 갈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맞나 싶게 이국적인 풍경이다.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앞서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고인의 마지막 유언이 새겨져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우리네 묘원과는 조금 다른 자유스러움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각기 개성 있어 보이는 묘지들과 비석들은 삶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평안을 빌어 주는 듯하다.


이 묘지에 서면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그것은  여기 누워있는 자들의 삶과 정신을 함축한 묘비명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숨을 거둔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인들이 묻혀있다. 특히나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 헐버트 박사의 묘지는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씩 들러보는 명소이다. 그 밖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묘비명들 중 우연히 본 ‘여보, 당신은 그렇게 아름다웠소’라는 글귀는 죽음이란 감당할 수 없는 고독과 두려움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불러일으켰다.


아직까지는 순수함을 잃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는 묘비명 정하기가 그 아이보다 더 어려운 숙제가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자연들은 시간을 통하지 않고는 성숙하거나 열매 맺을 수 없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아직도 내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조급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각자 살아가는 수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났음으로 해서,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삶이야말로 바람직한 생의 마침표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나저나 내게 어려운 숙제를 던진 녀석이 오면 묘비명을 어찌 정했는지 물어야겠다. 나보다 더 현명한 답이 나왔다면 체면 불고하고 슬쩍 표절이라도 할 요량이다. 그것이 지금의 삶을 돌아보는 거울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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