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 Oct 07. 2022

사소한 것에 목숨 걸기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친절한 톰 아저씨의 <바닐라 스카이 >를 볼 때 일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 고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데이빗(톰 크루즈)이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만나기 위해 나이트클럽을 찾아간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소피아는 데이빗에게 차갑게 굴고 오히려 함께 온 데이빗의 친구 브라이언이 그녀의 연인에 더 적합해 보인다. 크게 상심한 데이빗은 줄창 테킬라를 마셔대고 멀찌기서 흥겹게 춤을 추는 그녀를 바라본다.     


사단은 바로 여기서 벌어졌다. 그때 플로어에 흘러나오던 음악이 문제가 된 거다. 데이빗과 소피아의 관계가 아니라 내 일상에 벌어진 일이다. 분명 귀에 익은 음악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 거다. 보통 이런 경우 인터넷을 뒤져보면 금세 해결되련만, 어처구니없는 편집증은 그 장면만을 반복 재생해가며 돼지우리 같은 기억 속을 더듬고만 있었다.     


이런 상황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한두 번씩은 경험하는 일이다. 일상에서 이것처럼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경험도 없지 싶다. 입안에서 하루 종일 어떤 노래를 옹알거리는데 정작 그 노래의 제목과 부른 이를 도무지 기억해 낼 수 없는 황당함. 그래서 끝끝내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찾다 지쳐 제풀에 쓰러진 어떤 하루.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사실 유쾌하달 순 없는 경험이다.


성격이 무던한 사람이라면 '였더라? 에이 관두자'하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겠지만 말기에 가까운 편집증을 앓고 있거나, 나처럼 신경이 예민한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다. 식음을 전폐할 것까지야 없지만 도무지 다른 일에 집중이 안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슬픔도, 고통도 때로 약이 되듯이 이런 난감한 상황이 도움을 줄 때도 있다. 일상의 만연한 문제들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자질구레한 고민거리들, 우리 고딩들 수능 걱정, 가을만 되면 도지는 계절병, 유독 내게만 가혹한 것 같은 세상 따위는 어느 틈엔가 저만치 물러나 있다. 오로지 지금 내가 원하는 정보에 대한 열망이 전부가 되고, 그러다보면 뒷목 뻐근하게 스트레스받는 일상과의 팽팽한 긴장도 어느덧 부드럽게 이완된다.


흔히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들 한다. 그렇잖아도 인생은 신경 쓸 것들의 천지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가끔은 릴랙스 하게 하찮은 문제와 마주 앉으면 복잡한 세상살이가 한순간 아주 단순해진다. 아!, 편집증은 조심해야 한다.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처럼 설거지를 하다 갑자기 답이 번뜩 떠올랐을 때 "야호!"를 외치며 치솟는 엔도르핀과 도파민, 아드레날린(셋 중 뭔지 몰라서)은 덤이다.


(답은 영국의 일렉트로니카 그룹 Underworld의 Rez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침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