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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23. 2022

하마터면 사과장수의 딸이 될 뻔했다

과일을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한가위쯤 되니 집에 과일이 골고루 있다. 빠른 추석이라 그런지 사과나 배가 썩 맛있진 않지만 나름 자기의 맛은 가지고 있었고, 선물 받은 멜론은 달달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맘때 제일 맛있는 머루 포도는 쟁반 위에 소복하게 쌓인 검보랏빛의 껍질로서 천형을 벗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사과를 거의 먹지 않는다. 가끔 푸른색의 아오리 사과는 한 조각씩 먹긴 해도 부러 사과가 먹고 싶어 산 적은 없다. 내가 일생 먹을 사과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치면, 나는 어느 시절에 그만큼의 분량을 다 먹어치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그때는 국민학교),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나 보다. 자세한 건 모르니 짐작 투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긍정적인 성격의 아버지 얼굴이 어두우니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았지만, 아빠바보였던 나는 들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 때문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영화와 팝송에 눈을 뜬 나와 아버지의 유일한 의견 차이는 팝스 다이얼의 김광한을 좋아하느냐,  2시의 데이트의 김기덕을 좋아하느냐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커다란 자루를 메고 들어오셨다. 그 자루 속엔 사과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내일부터 큰 시장에 나가서 사과를 팔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과 한 알을 슥슥 옷으로 문질러 내게 주었다. 지금까지 먹던 사과와는 달리 아버지가 파는 사과는 사과꽃 향기와 사과나무에 내리쬐던 햇살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어이없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과장수의 딸이 되었다.


짐작한 대로 아버지는 사과 파는 일에 소질이 없었다. 사과를 바구니에 예쁘게 쌓아 놓지도 못했고 사과를 사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리어카가 저 혼자 굴러가 남의 자동차를 들이받고 그때까지 판 사과값의 몇십 배를 물어주기도 했다. 또 리어카가 엎어져 사과에 멍이 들어 팔지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가져온 날도 있었다. 파는 것보다 가져오는 양이 더 많았고 나와 동생이 먹어도 먹어도 우리 집엔 사과가 남아돌았다. 그때 나도 서서히 사과가 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사과 장수의 딸로 살아야 하나 싶어 고민했더랬다.


엄마가 몰래 한 번 나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리어카에 사과를 대충 부어 놓고 멀찍이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있더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웃었다. 담배를 물고 낯선 시장 바닥에 앉아 아버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세상 구경을 하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면 누군가가 말한 '인생이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상자를 열어보는 설렘 때문에 살아볼 만한 것이다'라는 개떡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항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 일탈이라면 일탈이었을 사과 장수는 그렇게 두어 만에 접게 되었고, 부산에서 제법 선박회사에 얌전히 취직을 하셨다. 보이지 않는 창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의외로 홀가분하게 보인 것은, 내가 신빙성 없는 관찰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아름답고 기쁘고 좋은 것만을 선물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만약 아버지가 사과 장사에 소질이 있었더라도 내가 사과 장수의 딸로 계속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에겐 그 두어 달이 인생의 쉼표가 아니었을까. 바삐 살아온 지난날을 시장 바닥에 앉아서  반추하며 울고 웃었으리라. 이제 막 반환점을 돈 지점에서 잠시 앉았다가, 다시 반을 뛰어갈 힘을 비축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두 달여 동안 사과장수의 딸이었었다. 이렇게 글로 추억할 줄 알았더라면 아버지가 계실 때 사과 장수로 살아보니 어땠냐고 물어라도 보는 건데, 붙잡히지 않는 헛헛한 꿈만 꾸면서 시간은 늘 내편이라 생각했다. 매양 깨달음은 늦고 시간은 또 이렇게 가을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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