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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Nov 30. 2022

뒤집혀 꽂혀있는 책들

권력 없는 독자가 표절을 대하는 자세

소설가 S의 산문집과 J의 단편소설집이 왔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인터넷 서점 카트에 넣어 놓았다가 한 달에 한 번쯤 주문을 한다. 한동안 카트에 넣어만 놓았는데, 여러 권을 사면서 함께 딸려왔다. 아니 짐짓 모른 척하며 결제 버튼을 누른 것일 게다.


쓰는 데 별 재능이 없으니 읽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고 신뢰하는 작가들이 꽤 많다.

굳이 작가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별하는 것은 무지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성 작가들 중에 다섯 명쯤 좋아하는 작가를 추려보라고 한다면 고민은 되겠지만 어렵지 않게 손꼽을 있다. 년 전에 작고하신 P작가 그리고 E작가 또 다른 J작가와 함께 위에 언급한 작가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으로 나의 사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던 작가들이다.

 

유독 힘들었던 시절, 서른을 앞에 두고 공무원 생활을 접고 오로지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을 때, 오라는 곳이 없을 때, 가고 싶은 곳도 없을 때 S작가의 책은 내 한 부분이었다. 그녀의 책이 나오면 서점의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신간을 손에 쥐었다. 아까워서 바로 읽지도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편지를 썼고, 그녀와 마주 앉아 차 한잔 할 수 있다면 내 가진 것 다 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몇 년 전 무너졌다. 표절이었다, 명백했다. 그 무슨 변명도 필요 없었다.(이것은 독자가 판단할 몫이니까) 문단은 보호자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그동안 그녀가 문학계에 헌신한 것으로 퉁치자 했다. 작가를 보호하려는 문단의 행태에 절망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당혹스러웠고 절망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의 진정성을 앞에 두고 나는 울었다.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만큼, 딱 그만큼 나는 치욕스러웠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문학이란 걸 모를 내가 아니고 매번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그녀를 짓눌렀을지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S작가라면 이겨내야 했다. 나에게는 별이었으니까.


그 후의 이야기는 일부러 외면했기에 잘 모른다. 다만 새로운 신간을 내면서 작가의 변이라는 것도 진정성 있는 사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S작가의 글은 이제 읽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후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 산 산문집 말고도 작년에 발간된 장편소설도 읽지 않았다.


S작가 보다 몇 년 더 앞서 J작가는 자신이 심사한 신춘문예에 응모되었던 작가 지망생의 투고 작품의 소재와 아이디어와 제목도 그대로 베꼈다는 오명을 썼다. 그 뒤 해명조차 하지 않은 채 공방이 이어졌다. J작가는 끝까지 문단의 등 뒤에 숨었고, 메이저 미디어에선 다뤄지지도 않아 결말을 알 수 없다. 우연히 그녀의 등단작부터 결 고운 섬세함에 빠져들었고, 작가 스스로 자신을 못난이 취급할 때에는 나인 양 함께 가슴 아팠고, 응원했고, 문학계에서 뿌리를 내리고 굵은 나무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아이디어 도용 공방은 참혹스러웠다.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는 문학 평론가의 말은 부인할 수 없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문장에서 받은 감동을 내 안에 숨기고 있다가 내 글 어느 구석에서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읽기만 하는 자, 또는 쓰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읽고 쓰는 자의 딜레마이며 글을 쓰는 이 누구라도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 있던 한두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통째로, 아이디어와 소재가 통째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스캔들처럼 바람이 지나가기를 엎드려 있는 자세가 독자를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것이 돈이나 문단 권력과 결부된 비즈니스의 문제라면 더더욱 희망은 없다.


S작가는 복귀를 하면서 '오그라든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회복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는 이기적인 말로 또 한 번 나를 실망시킨. 결국 자신의 치유는 시작되겠지만 무너진 독자의 마음과 허망함은 누구에게 위로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애정의 크기만큼 미움도 깊어져 너무 아프다.


가진 것이라고는 좋은 문장을 읽어내는 능력뿐인 권력 없고 옹졸한 독자인 나는, 책장에 집힌 채 꽂혀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그런데 책들을 치우는 순간 내 지난 시간 일부분도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치워 릴 수가 없다. 뒤집어진 채로 한동안 저렇게 흉하게 두련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구입해서 읽지 않고 저렇게 책장에 뒤집어 놓는 게 그들에게 벌이 될까. 진짜 독자 한 명을 영원히 잃었다는 것을 저들이 알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나의 절망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문학은 마음을 치유하고 영혼을 격려하는 힘이 있다.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문학이고,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도,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것도 문학이다. 개인과 개인 간 혹은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힘도 문학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것이 내가 아직도 문학의 변두리에서 배회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은, 천형을 벗어던진 작가 몇 명과 문단 그리고 출판자 몇이 만들어내는 산물이 아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읽는 자는 대를 이어 영원하고 그럼에 문학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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