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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07. 2022

영혼의 한기를 녹여주는 뱅쇼

며칠 전, 올해 수능을 본 녀석 하나가 예고도 없이 불쑥 학원으로 찾아와서 커다란 사과 한 박스를 턱 내려놓고는 "쌤! 발표 나면 다시 올게요" 그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뛰어간다. 녀석 뒤통수에 대고 "발표 나면 쌤이 고기 사줄게. 애들 끌고 와!"라고 소리를 치니 "넵!"하고 사라진다. 언제 저렇게 컸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좋은 어른으로 커 가는데 내가 한 꼬집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다. 대학생이 된 녀석들은 가끔씩 아이스크림이나 내가 좋아하는 파운드케이크를 지나가다 들렸다며 사 오기도 하고, 입대한다고, 휴가 나왔다고 인사하러 오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비혼인 나를 망각하고 엄마 미소가 지어진다.


며칠 상간에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코끝이 쨍한 것이 등으로 한기가 쓰윽 들어온다. 어제까지 얇은 카디건 하나만 입고 다니다가 꼴좋게 되었다. 요즘은 약국에 종합감기약 하나 사러 가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라 연말에 마시려고 백화점에서 사 온 와인 중에 그나마 가격이 저렴한 것으로 한 병 헐어 뱅쇼를 만들었다. 녀석이 가져온 사과를 뽀득뽀득 씻어 나박나박 썰어 넣고 냉장고에 있던 귤과 레몬, 올 겨울 첫 수확했다나 어쨌다나 하는 비싼 딸기님 몇 알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시나몬 스틱도 챙겨 넣었다. 뱅쇼가 서서히 끓어오를 때, 포도 향기도 레몬 향기도 딸기 향도 시나몬 향기도 사과를 들고 온 녀석의 마음도 온 집안에 퍼진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살이를 하러 서울로 혼자 올라갔던 첫 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서울은 부산의 겨울과 사뭇 달랐다. 어쩌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있던 내가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 던져져 자생해야 했던 그날들이 내겐 겨울이 계속되는 것 같았는지도 몰랐다. 본청에만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그곳의 첫날부터 우리 집의 따뜻한 내 다락방이 그리웠다. 다락방 속에서의 삶은 '나의 세계에로 던져져 있음'이었다면 서울에서의 삶은 '존재자에 의해 세계 속에 던져짐'이었다. 그 후 나는 체온이 낮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늘했다.


아직도 삶이 참 춥다. 성냥팔이 아이처럼 혼자의 힘으로 버티기엔 발 끝부터 냉기가 올라온다. 손바닥만 한 볕에 몸을 붙이고 앉아 서로 체온을 나누는 행위 그것이 한기를 녹이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혼자이고 싶다는 내 안의 소리가 참 집요하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팬데믹의 등 뒤에 혼자 숨어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자 풀풀 화를 내던 이들도 이제 잠잠하고 누구 하나 나를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시도조차 않는 이 상태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단방 처방이지만 삶의 냉기를 녹이는 방법도 조금씩 깨우쳐 간다.



분홍 수면양말을 신고, 두터운 가운을 꼭꼭 여며 입고 앉아 마신 뱅쇼 한 모금에 몸이 금세 따뜻해진다. 찡찡거리던 코끝에도 기가 돈다. 갑자기 왈칵 행복하다. 몇 날 며칠 좋지 않던 컨디션도 덩달아 훈훈해지는 것 같다. 뱅쇼 한 잔으로 내 영혼도 조금 따뜻해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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