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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Feb 14. 2023

이름에 관한 소고

내 이름은 엄마가 지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태명을 짓고, 배우들의 멋있는 이름을 따서 짓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첫 딸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 주고자 부모님은 꽤 고심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우연히 일본 방송에서 본 '유미'라는 이름과 아버지가 후보로 내세운 '은주'라는 이름을 놓고 경쟁했었다고 다. 9남매 중 막내였던 엄마의 이름은 子자 돌림의 촌스러운 옛날 이름이어서 아마도 콤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첫딸의 이름 짓기는 엄마의 승리였고, 부드러울 柔자에 아름다울 美자를 고르고 골라 지금의 내 이름이 되었다. 지금은 흔한 이름이지만 몇십 년 전에는 예쁜 이름이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스스로 이름 지어야 할 일이 많이 생겼더랬다. '아이디'와 '닉네임'을 스스로 정해야 할 때, 그 옛날 내 부모처럼 이름 짓기에 몇 날 며칠 고심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그런 멋진 아이디와 닉네임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름 짓는 것엔 영 소질이 없는 듯하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인터넷상에선 '미도리'란 닉네임을 썼었지만 지금은 나를 대변할 이름을 정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할 때도 주객전도 되어 글에 대한 고민보다는 작가명을 짓는데 더 고심했었다. 나름 의미 있게 지어본다고 '글 본문'의 순우리말인 '글마루'로 짓고 '글의 정상에 서보겠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참언(讖言)처럼 마음속에 새겼다. 그러나 당찬 포부가 담긴 것과는 다르게 특징도 없고 위트도 없는 작가명이 되고 말았다. 요 며칠 동안 브런치 작가명을 바꾸려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인데, 나의 정체성과 취향에 맞는 이름 짓기가 너무 어려워 그 옛날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字)'와 '호(號)'를 지었다. 字는 약관의 나이가 되면 부모님이나 집안의 어른들이 별명으로 지어 주는데, 이름 대신에 부르던 또 하나의  이름이다. 號는 예술가들이나 덕망 있는 사람을 쉽게 부르기 위해 닉네임이나 필명처럼 스스로 지어 부르던 이름으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호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매월당이란 호로 잘 알려진 김시습은 호와 법호, 시호까지 합하면 열개가 넘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추사 김정희는 호만 503개가 있었다고 한다. 뜻하는 바와 쓰임에 따라 그때그때 지어 부르신 모양이다.


이규보는 아예 호를 잘 짓는 몇 가지 방법을 글로 남겼다. 첫째는 태어난 곳이나 살고 있는 곳(예를 들면 파주시 '율곡'에 살던 이이), 둘째는 좋아하는 것(집 앞의 다섯 그루 버드나무를 좋아한 도연명의 '오류'), 셋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을 본받겠다는 의미로 지은 '사임'당)을 호로 지으라는 것이다. 옛 문인들은 자신이 지은 호의 의미를 밝힌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것을 '호기(號記)라고 한다.  방법들은 요즘의 닉네임이나 필명을 정할 때 써도 꽤 유용할 것 같다.




김춘수 시인처럼 거창하게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다가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타인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 그러고 보면 이름이라는 것은 불리는 자의 몫이 아니라, 부르는 자의 몫인 듯도 하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있는 것이든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 이외의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다. 이름이 없어 무명無名으로 불리더라도 그것 조차 그 존재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 너머의 무언가도 함께 부른다. 하지만 '이름'이라는 시니피앙은 자의적이기에 '나'라는 시니피에를 모두 반영하지는 못한다. 해서 나를 오롯이 담은 그런 이름 하나 는다면  너머의 무엇도 함께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이름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존재로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다움을 온전히 담은 좋은 필명을 짓고 싶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에 더해, 내 삶의 가치관과 취향을 반영한 보다 주체적인 그런 호칭, 나를 나답게 하는 그런 이름 말이다. 이런 고민하는 시간에 글이나 열심히 쓰는 게 어떻겠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좋은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듯, 지치지 않고 계속 쓸 수 있게 힘을 실어 줄 이름 하나 갖길 원한다. 그리고 불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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