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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冬芽)​

봄꽃은 갑자기 피지 않는다

by 마루

지난해 늦가을 11월 말경, 첫눈이 온다는 절기인 '소설'에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는 뉴스가 눈과 귀를 붙잡았다. 올해도 다르지 않아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에 철쭉이 피었고, 또 어디는 개나리도 피었다 한다.

누가 시작했을까. 봄이 왔다고 누가 잘못된 정보를 흘렸을까. 철새들은 리더가 길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고도 하던데 식물들도 그렇구나 싶었다. 계절을 착각한 화면 속 봄꽃들이 앞으로 시작될 매서운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측은하다. 돌아오는 진짜 봄에 한 번 더 꽃을 피우는 것인지, 새봄엔 꽃이 피지 않는 것인지, 꽃이 피지 않으면 열매도 씨앗도 낼 수 없을 텐데. 그들을 바라보는 뭇사람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식물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잎을 낸다.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어 다시 씨앗을 만든다. 모두가 아는 식물의 생장 과정이다. 그러나 생강나무, 미선나무, 매화나 산수유,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등 비교적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꽃이 먼저 핀다. 이파리 하나 없는 횅댕그렁한 회색 가지에, 꽃눈이 움트고 곧이어 꽃을 매단다. 그 꽃이 떨어져야 비로소 잎이 돋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 피는 꽃들보다 봄꽃들은 훨씬 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온 세상을 환상으로 물들이는 봄꽃들이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주 오랜 시간,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핀다. 나목에서 갑자기 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늦여름부터 겨우내 준비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 어느 날 급히 꽃송이를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늦여름부터 겨울눈을 만든다.

겨울눈은 나무들의 종류에 따라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것과 보드라운 털로 감싸거나 껍질에 밀랍 같은 기름을 바르는 등,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낸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견디고 다음 해 봄, 온도와 햇빛에 따라 꽃을 언제 피울지 시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온도에 민감한 겨울눈이 일정 시간 따뜻한 온도가 지속되면 착각을 일으켜 겨울에도 더러 꽃을 피우기도 한단다. 안타깝지만 이런 경우 열매를 맺지 못한다. 수확 없는 한 해가 되는 것이다.

꽃가루받이해야 할 벌과 나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을, 겨울 속 봄꽃들을 다시 생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꽃을 만들어 열매를 잉태하고, 잎을 돋우어 그 열매의 성장을 도우리라 다짐했을 테다. 그런데 시기를 착각한 겨울눈이 꽃을 피우고 말았다. '꽃을 피웠는데 왜 이렇게 춥지?' 겨우내 절망과 후회의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눈의 좌절을 나이테에 새겨, 또다시 봄을 준비할 것이다.

만사가 그렇듯, 겨울에 꽃을 피운 봄꽃의 겨울눈이 그러하듯, 비록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욕망했던 시간과 노력의 본질은 헛되지 않다. 겨울눈처럼 인고하되 온도가 맞으면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운명’이다.

우리도 그래야 하듯, 봄꽃은 갑자기 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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