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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an 23. 2023

꽃처럼 사랑도 한순간에 진다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詩  <선운사에서>





선운사는 동백으로 유명하다.

동백꽃은 긴 겨울을 꽃맹아리로

춥게 견디다가 두꺼운 잎이

한 잎 한 잎 정성스럽게 벌어진다.

그런데 필 때와는 달리 꽃이 떨어질 때는

정말 한순간에 송이째 뚝 떨어진다.

조금의 징조도 예고도 없다.

떨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누가 애먼 꽃송이를 똑똑 따다가 길에

뿌려놓은 것이라고 착각할만하다.


화자의 독백처럼 사랑을 시작할 때는

동백꽃이 필 때처럼 시간을 다해 피지만

끝날 때는 꽃이 지는 것처럼 사랑도

한순간에 진다.

그리고 사랑이 지는 건 순간인데

잊는 건 또 한참 걸린다.

다른 꽃이 피어도 앞서 꽃을

영영 잊는 건 아니다.


사랑과 이별을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비유한 많은 시들은 애상적이거나

영탄스러워 읽는 이들에게도

슬픔을 전이시킨다. 그러나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는

이별과 그리움 앞에 담담하다.


누군가는 내게 혀를 끌끌 차며

'화려한 젊은 날은 가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곁을 내줄 수

있을 만큼 순해졌으나,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떨어진 꽃 마냥

혼자서 쓸쓸히 청춘의 뒷자락을

되새김질하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매몰차게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고독감"이라고

조금 쓸쓸히 웃으며 전하고 싶다.


내 이별처럼 눈물 흘리지 않고

담담한 최영미의 이별과 그리움을 담은

<선운사에서>가 좋아 마치 내 노래인양

오랫동안 같이 쓸쓸했던 시다.





<선운사에서>가 수록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오랜 세월 나와 함께 한 시집이라

낡디 낡았다.

책이 낡은 만큼 도 낡을 법하지만,

읽을수록 마음이 수런거린다.

오래전, 서른을 앞두고 있던 내게  

'잔치가 끝났다'는 시인의 노래는

명치끝에 걸렸었고, 두려웠었다.

두려웠던 만큼 마음도 단단히 먹었더랬다.


그런데...

온다 온다 해 놓고선 돌아보면

어느새 가고 없는 매정한 계절 봄처럼,

내 서른도 딱 그랬다.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올 것 같더니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서른 고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르륵 가버리고 없었다.

아쉬움은커녕 내 생애 가장 힘들고

두려웠던 시기가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

것에 안도했다.


이렇게 살 수도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던 그 시절을 겨울나무처럼

무심하고 의연하게 넘기고,

나의 삼십 대에게 웃으며 안녕을

고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집의  담담한

위로와 시인에게서 느낀 동질감 때문이었다.



#최영미 #선운사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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