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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Feb 07. 2023

이번 생은 틀린 거 같아요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교 여학생 한 명이 풀이 죽은 소리로 '이번 생은 틀린 거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 녀석 딴에는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웃음이 났다. 이제 열여덟인데 이번 생은 틀렸다니, 그것은 내 나이 때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다독거렸다. 아마도 진학과 관련해서 부모님과 의견이 다른 것 같았다.


아이를 보내고 나도 한 번 따라 해 본다.

"이번 생은 진짜로 틀린 걸까?"


지난 연말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TV에서 연예 시상식을 하고 있었다. 상을 받은 어떤 연예인이 자기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 'OOO작가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한다.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도 그 이름만이 번뜩 귀에 꽂혔다. 그 예능프로그램 메인 작가가 고모의 아들, 내 사촌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 작가인 줄은 고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프로그램의 작가인 줄은 이번에 알았다. 그것도 그 프로그램을 기획한 메인 작가라니... 내가 부산에 내려온 후 오랫동안 만난 적이 없지만, 그래도 먼저 대단하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 '쳇, 나는 보지도 않는 재미없는 예능, 그까짓 작가가 뭐 대순가?' 라며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되는 비밀을 무심코 발설하듯 뜻밖의 생각이 튀어나왔다. 여우와 신포도처럼 인지부조화 작전으로 나 스스로를 속이겠다는 심리의 발현이었을 게다. 또한 사촌이 땅을 사면 왜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나 자신에게 놀랍고, 그런 생각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 인간답다 포장하다가도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의 바지런하지 못함과 촌동생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한 자책 때문이다. 경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지난날들이 가끔 후회가 될 때가 있다. 마음이 동하면 쓰다가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아 딴짓을 했다. 글을 쓰지 않을 그럴싸한 변명을 수상소감처럼 늘 준비해 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지난 십여 년은 내가 운영하는 학원이 도피처였다. 바빠서 제대로 된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작가로서 능력 없음을 감추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수필계에선 이른 나이인 삼십 대에 등단한 후 문예지에 몇 작품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올해의 작품상 단행본에 실리고, 그 해 수필 20선에 유명 수필가들과 함께 이름이 올라가도 왠지 모르게 심드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 후 열심히 쓰지는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빼어난 작품을 쓰겠다는 당찬 포부만 달처럼 걸어놓고 주변을 빌빌거렸다. 난 언제든지 쓸 수 있다 헛꿈 꾸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이 하루키 씨! 내가 당신 소설을 읽어봤는데 그게 소설이요? 그런 소설은 나도 쓸 수 있겠소."

하루키는 대답했다.

"물론 쓰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쓰지 않았잖습니까?"


피나는 노력과 실패와 눈물이 사촌 동생을 지금 그 자리에 올려주었을 것이라는 거 백번 짐작할 수 있다. 나와 사촌동생의 차이를 생각한. 사촌동생은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는 꿈속에서 최선을 다한 차이가 아닐까? 내 학생 녀석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이번 생은 틀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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