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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an 07. 2023

이 세상 모든 아버지는 가난하다

가정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詩 <가정>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의 멈춰진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차 보곤 한다. 비싸지 않은, 실용적인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시계다. 몇십 년 된 시계니까 이제는 빈티지로 불러도 좋을 아버지의 웽거 시계.


갈색의 낡은 시계줄에서는 아직도 아버지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시집도 보내지 않은 두 딸을 놓고 기어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얼마나 서러웠을까 생각하니, 나는 매일이 서럽다.


육 문 삼 귀여운 신발 옆에 놓인 십구 문 반 가난한 시인 아버지의 신발은, 현재의 크기로 따지면 468밀리미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발이다.


그 거대한 신발 속에는 아홉 명의 강아지들의 삶과 미래가 달려 있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걷기엔 얼마나 무거웠을지, 얼마나 버거웠을지.


가정이란, 피를 나눠 주고 나눠 받은 서로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관계들의 보금자리다.

가정과 집이 조화를 이룬 합일을 꿈꾸나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집이 가정을 지켜주지 못하고, 가난한 시인은 아홉 마리 강아지를 배불리 지켜주지 못하는 설움으로 아비의 존재가 어설프다 미소한다. 목월 시인의 이 자전적인 이야기는 너와 나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나누어 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는 가난하다. 내 아버지도 시인과 마찬가지였을 터.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미안하다 웃음 지었다.


아버지는 두 딸을 지상에 놓고, 십구 문 반의 신발도 벗어 놓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아버지의 시계는 연민(憐憫)한 인생의 길이 멈춘 슬픈 초상(肖像)이다.


#가정 #십구 문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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