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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ug 17. 2021

여름과 까치밥


早夏


일기예보에서 ‘장마’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국지성 호우가 자주 내린다는 이유를 들어 기상청에서는 장마예보를 미리 하지 않는다. 기상예보가 자주 빗나가자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는 듯 들리는 이유는 나의 삐뚤어진 심사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작년 추석 무렵부터였을 게다. 온 동네의 땅을 헤집고 뒤집어 놓았다. 여기저기 파 놓은 흙더미와 돌 더미들을 피해서 걷는 것이 매우 곤혹스러웠다. 벌써 반년 가까이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하수관 교체공사라지만 피부에 직접 와닿는 까닭이 아니어선지 늘어지는 공사기간만큼 짜증도 길어진다. 장마철이 되자 공사가 마무리된 구간은 서둘러 아스팔트로 메워지기는 했으나 평평하지 않고 심하게 울퉁불퉁하다. 손끝 야물기로는 우리나라의 건설공사 업자들을 따를 이가 없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현장이다. 차를 몰고 지날 때마다 “어이쿠”라는 소리가 나오면서 경추에서 흉추, 요추를 지나 미추까지 전기가 찌르르 온다.


장마인지 아닌지 요즘 비가 잦더니 어제도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하지만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하늘도 쨍한데 땅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공사로 파헤쳐진 곳곳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무심코 걸어가다 물웅덩이에 눈을 주는 순간 파란 하늘이 그곳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다. 크기는 작았으나 눈부시게 푸르렀고 조각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는 모양새가 제법 하늘 흉내를 낸다. 그때다. 어디선가 참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내려앉더니 웅덩이의 물을 마시고는 목욕을 한다. 내가 몇 날 며칠 화를 냈던 웅덩이가 참새들에게는 이렇게 훌륭한 쉼터가 되는가 싶었다.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을 했더라면 이 참새들은 어디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할까. 새삼 공사 마무리를 느슨하게 한 누군가가 부러 참새들의 쉼터를 만들어 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새 파헤쳐진 웅덩이의 물도 거의 말라 있다. 이 웅덩이가 참새들에겐 작은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곳에 다시 물이 차올라 참새들의 목욕탕이 되는 날은 또 언제일까 싶어 쨍한 조하의 하늘 한번 올려다본다.





炎夏


이글거리는 한낮의 땡볕이 아스팔트에 남은 마지막 수분까지 살을 뻗친다. 냉장고 속에서 충분히 몸을 식힌 수박이 칼을 대기도 전에 쩍 하고 붉은 속살을 드러내자 한결 더위가 가시는 듯하다. 한여름 숨 막히는 태양에 괴로운 것은 사람만이 아닐 게다. 뒷산에서 그리 울어대던 새들이 산중 어디 시원한 그늘로 피서라도 떠난 것인지 한낮에는 기척이 없다. 땀샘이 없어 땀을 흘리지도 못할 그들은 어디서 사십 도가 넘는 체온을 식힐는지 궁금하다.


베란다 밖 화분걸이에 채반을 내어 놓고 과일 껍질을 말리기 시작했다. 수박이니 멜론이니 하는 것들은 알맹이 못지않게 껍질의 덩치가 커서 금방 쓰레기로 쌓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과일의 껍질들을 내다 말린 후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부피가 줄어들어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일 껍질을 모아 말리기 시작한 며칠 후 쓰레기를 모아 버리려고 베란다 바깥문을 열고 보니 이상하게도 양이 몇 줌밖에 되질 않는다. 유심히 보니 새가 쪼아 먹은 자국이 있다. 아마도 아파트 바로 뒤에 있는 숲에서 건너온 모양이다. 현장을 목격할 요량으로 거실에서 베란다로 부지런히 눈길을 주고 앉아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채반 위로 포르르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채반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수박의 남은 과육을 쪼아 먹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어찌나 야무지게도 쪼아 먹는지 그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도 녀석은 정신없이 먹고 있다. 생김은 그닥 예쁘지 않은데 몸짓에서 맹랑함이 느껴지는 새다. 그 녀석이 가고 난 후 여러 마리의 새들이 시간 간격을 두고 다녀간다.


 자연은 여름에 더욱 왕성해진다. 식물들은 끝없이 세를 넓히고, 곤충들도 더욱 식구들을 늘려간다. 그들을 먹고사는 새들에겐 살맛 나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먹이도 풍부하고 알을 낳기 위한 둥지를 만들기에도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불볕더위와 폭풍우, 도시의 소음과 매연도 그들이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다. 갓 부화한 알들을 지키기 위해 부부 새는 밤낮을 바꿔가며 노심초사했을 터이고 도심의 조그만 물웅덩이에서 마음 놓고 더위를 식힐 수도 없었을 게다.


염하 한 낮, 그들의 시난고난한 삶에 한 조각 디저트가 될 과일 껍질을 부지런히 나른다. 예전보다 과육 부분을 조금 더 남겨놓고 버리는 것은 나만의 작은 보시인 셈이다.





晩夏


하절은 끝물인데 더위는 아직도 맹렬해서 날짜를 잘못 헤아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사람도 이럴진대 하물며 뒷산의 철새들은 어떤가. 떠날 날짜를 못 맞추는 것은 아닐까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시절이 하 수상해서 사는 것도 초름한데 계절마저 새치름하다.


지난해부터 무척이나 힘든 일들을 많이 겪은 친구가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친구인데 오죽 힘들었으면 얼마 전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소원을 빌었다고 씁쓸히 웃는다. 하나님도 아니고 성모에게도 아닌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수런거린다.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원망을 쏟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안 좋은 일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찾아올 때 말이다. 절망에 주춤거리는 이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란 고작해야 희망을 잃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 밖에 없다. 생을 접고 싶을 때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힘들다고 모두 다 포기하면 그게 인생이냐고, 삶이란 고팽이도 있고 평지도 있는 거라고, 가끔은 비바람도 치고 해일에 휩쓸리기도 한다고 등을 토닥인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 앞에서도 쉬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석과 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을 친구에게 내민다. 씨로 남겨 둘 과일은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인데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자손을 위해 복을 남겨둔다는 뜻이다. 한 여름 무성했던 잎들을 비우고 뼈마디만 남은 감나무 위로 빈 하늘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 것인가. 그나마 까치밥 하나 그 하늘에 매달려 있다면 다음을 기약하는 희망이 될 터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나눠 줄 붉은 까치밥 하나, 끝물 여름에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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