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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un 18. 2021

살리에리가 쓰는 아리아

                                                                                                                                                                                                                                                                                                                                                                                                                                                                                                               

수많은 단어들을 썼다 지운다. 빛나는 문장이 되지 못한 조각들이 삼류 작곡가의 오선지처럼 쌓여간다. 수많은 문장가들의 선율을 읽으며 노력했지만 쓰는 재주가 따르지 못함이 통탄스럽다.
죽도록 성실하게 노력했지만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작곡하지 못하는 살리에리와, 그다지 노력하지 않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에 천재라 불리며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는 모차르트를 떠올린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볼 때마다 엉뚱하게도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살리에리에게 애정을 느낀다. 신에게서 재주를 흠뻑 받은 모차르트에 비해 평범하기만 한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며 살리에리는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그는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모아서 분석하기도 한다. 모차르트의 작곡 해법만 찾아낸다면 그도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해법 찾기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창작이라는 것은 수학 문제처럼 공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을 게다. 다만 죽을 듯이 노력을 해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했을 것이다. 1등을 앞질러 보고 싶은 것은 살리에리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니까. 좌절한 살리에리는 신을 향해 울부짖는다.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위대한 작곡가로서 신의 영광을 찬미하고픈 그의 기도가 분수에 맞지 않는 허욕임을 냉철하게 보지 못한 건,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눈을 떠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날들이 있었다. 거기엔 어떤 허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세상이 만만치 않음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좋은 문장가들이 쓴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고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 많이 썼다. 그러나 내가 읽고 쓰는 것은 순수하지 못했고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신분상승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니 제대로 읽힐 리가 없었고 좋은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마음으로 읽지 않았고 가슴으로 쓰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될 좋은 문장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열망과 반대되는 나의 재능 없음이 실망과 절망을 불러왔다. 경륜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문장에는 군살이 더덕더덕 붙고 글의 혈관은 갈수록 좁아진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보다 더 퇴보하고 퇴화하는듯한 느낌이 들 때 영화 속 살리에리처럼 재능 탓으로 돌린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재능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으로 위로받는다.


별로 노력하는 듯 보이지 않는데도 하늘을 펄펄 나는 사람들을 있다. 재능과 더불어 천재들에겐 없어도 될법한 노력하는 자세까지 더한 사람들을 볼 때면 초침이 내달리는 것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펼쳐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본 내 희망의 내용인즉 고작 질투밖에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의 재능이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다. 어떻게 이런 영감이 떠오를까. 문장은 또 어떤가.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단어들은 적재적소에 들어앉아 삶의 방향을 알려주고 고단함을 위로해주는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영혼을 팔아 재능을 산 겐가 싶어 약이 오른다. 그래서 살리에리와 같은 편이 되어 모차르트를 마음껏 조롱하고 질투해 보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대가와의 비교라 나를 비웃는 이도 있겠지만 모차르트 앞에서 살리에리가 느끼는 비애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엇이 다르랴.


재능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간절함일 것이다. 하지만 소망과 그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재능 사이의 커다란 간격을 느낄 때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칠십 점인데 누군가는 기본이 구십 점부터 시작하는 일 퍼센트의 사람들이 있다. 그 일 퍼센트의 사람들을 이기기 위해 악착같은 노력도 해 본다. 그러나 평범함에서 최고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차라리 인정하는 것이 속 시원하다. 자신이 절대로 모차르트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살리에리가 편안해졌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만을 기억한다. 작곡과 지휘자로서 꽤나 이름을 날렸고 궁정악장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살리에리의 곡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천재와 범재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 슬프지만 진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영화 속 살리에리의 몰락은 모차르트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가진 아흔아홉 개에 가치를 두지 않고 나머지 하나마저 채우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자신이 가진 그릇보다 더 많이 담기를 원하는 탐욕은 세상 모든 것들이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나는 살리에리다. 마음을 움직이는 선율을 쉽게 만들어내는 모차르트를 여전히 질투하며, 가진 것이라고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열망 하나뿐이다. 재능이 없어 지금껏 文의 빗장 하나 제대로 열고 닫지 못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들 중의 챔피언을 꿈꾸며 오늘도 아리아를 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살리에리들이여, 기죽지 말고 어깨를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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