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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Nov 22. 2021

다시 U턴하는 길

"째깍째깍째깍째깍……."

다른 계절의 시계들은 '째, 깍, 째, 깍'쉬어가며 움직인다. 그러나 이맘때의 시계는 쉼표도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 첫눈이 오기 전까지 남아있어 줘야 할 손톱 끝의 봉숭아 물을 힐끗거리듯 덜렁 한 장 밖에 남아있지 않은 달력이 가슴에 맨홀만 한 구멍을 뚫는다.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 몸 안으로 훅 들어온다. 기계 바람의 서늘함과 사뭇 다른 겨울의 한기寒氣다. 이런 한기를 느끼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불행하게도 먹을거리다. 염천 뙤약볕에서는 어림도 없는 호떡 기름 냄새와, 맛보다는 따스함이 미덕인 군고구마 그리고 뽀얗고 풍만한 육체 속에 달디 단 팥 앙금을 숨기고 있는 찐빵이 떠오른다.

 
이렇듯 다소 천박하고 육욕에 입각한 나의 솔직함을 부산스럽게 넘기고 나면, 그제야 조금은 무드 있는 거리가 눈과 귀로 들어온다. 높고 푸른 하늘, 그만큼 맑고 명료한 별빛, 바람에 휘날리며 뒹구는 노란 은행잎들, 시내 커피 가게  스피커를 통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솔로나 낮게 깔려오는 재즈 한 곡이 귓불에 휘감긴다.


그러나 역시 한기와 함께 어김없이 찾아드는 계절 내림은 목젖을 타고 알싸하게 넘어가는 술 한 잔의 유혹이다. 술이란,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게 하는 삶의 동력이자 다시 채울 것을 꿈꾸며 잎을 떨어뜨리는 갈잎 떨기나무처럼 스스로를 비우기에 더없이 좋은 매개체다. 


올해는 찬바람머리부터 유난히 술이 고프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다 마셔도 시원찮을 만큼 갈급증이 난다. 그건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술고래처럼 부끄럽기 때문일 게다. 또다시 어영부영 해를 보내버리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서 술이 마시고 싶은 것이다. 필름이 끊겨버린 전날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김영승의 <반성 16>처럼 또다시 술을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고은이 쓴 <시의 벗들에게>의 한 구절처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살아가자 다짐하며 술을 마시고, 보들레르처럼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글이 아니면 술이라도 취하고 싶어서 마셨을 것이다.


천재에겐 술이 영감의 촉매제일지도 모르지만 한낱 범인凡人에게는 폐인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해도, 그런들 어떠할까. 행복하게 술병을 껴안고 마지막 한 방울의 감주를 입에 머금은 채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천국의 문 앞에는  속으로 유턴하는 길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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