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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01. 2021

강 깊은 마을

귀가 밝아진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린다. 강더위 햇발 아래에서는 들을 수 없는 협화음들이 귀를 파고든다. 건들마에 참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누웠다 일어서는 풀 떨기들 속에서 방울벌레와 귀뚜라미 울음들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문을 열면 코앞으로 다가앉는 뒷산 자락의 가락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지만, 매해 처음인양 새로워 귀가 저절로 세워진다.


며칠 새 쑥 올라간 하늘을 이고 나섰다. 담아 올 풍경을 위해 빈자리 하나 마련해 떠나는 참이다. 노란 관을 쓴 은행나무들과 군데군데 수피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버즘나무 행렬을 지나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고속도로 양 옆에는 효수당한 볏단들이 서거나 누워있고, 시골마을의 고샅마다 까치밥 두엇이 달려있는 감나무들이 한해살이를 마감한 듯 편안해 보인다. 길섶의 풍경들을 안고 남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19번 국도로 접어드니, 왼편에서 은빛 강이 일어나 품속으로 달려 들어온다. 금빛 햇살만으로도 눈이 부실 지경인데 나붓대는 물빛까지 더하니 강은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얼굴 위로 쏟아진다.


섬진강 물길은 굴곡 있는 여인네의 몸씨를 닮았다. 산이 통째로 잠기어 앉은 물 낯은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하얀 모래사장은 양갓집 규수의 이마처럼 소담스럽다. 닮은 것은 모양새뿐만 아니다. 넓은 강폭은 아기자기하게 돌려 앉은 마을들을 끌어당겨 젖을 먹이는 마음씨도 닮아 있다. 강에서 삶을 퍼 올리는 재첩 잡이 아낙들이 보이지 않아도 저마다 원조라 내건 간판들이 줄지어 따라 흐른다. 섬진강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는 시인의 노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을 거슬러 오를수록 지리산의 서쪽 비탈진 자락이 바짝 다가앉는다. 층층이 깎아 돌로 괸 다랑논들 사이로 드문드문 박혀있는 마을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고만고만하게 사는 듯한 집들의 품새가 정겹다. 이른 봄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매화와 벚꽃과 산수유도 자취를 감추고, 한 여름 동안 무성했던 자생화의 향연도 끝났다. 가을 강가에는 은발의 새품만 지키고 섰는데 해거름 물비늘은 철 지난 축제에 미련이 남은 듯 보랏빛이다.


상류의 어느 마을에 섰다. 못처럼 깊은 소가 많아 강 깊은 마을(川潭里)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입구의 너른 들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단아하게 서있다. 아마도 마을의 당산나무인 듯하다. 새해의 행운을 비는 당산제 이외에도 절기에 따른 갖가지 놀이와 마을의 온갖 대소사가 저기서 열리겠다. 나무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곡절과 굿 소리가 배어 있겠는가. 넉넉한 품으로 보아 지나가는 손님의 작은 소망 하나쯤 들어줄 도량이 있어 보여 객쩍은 비원 하나를 작은 돌멩이에 담아 넓적한 돌 위에 슬쩍 얹어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추고 그 나무의 모양새를 눈에 담는다. 두 그루 중에서 큰 느티나무는 둥치가 굵어 제법 대접받을 만해 보인다. 회백색의 보굿이 군데군데 떨어져 만만하지 않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작은 나무는 큰 나무 굵기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잎들을 옴팡지게 매달고 있어 야무져 보인다. 큰 나무는 가지와 잎들이 오른쪽으로 꽤 치우쳐져 있는 반면 작은 나무는 희한하게도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 옆의 나무를 위해 서로 배려라도 하는 듯 선돌을 사이에 두고 각자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지들 때문에 멀리서 보면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나무의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어느 한쪽이 없다면 불완전하게 굽은 모습이다.


동생과 나는 두 살 터울이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건만 성격이 너무 달라 종종 다투었다. 어렸을 적부터 뜬구름 같은 이야기에 잘 홀리고 매사에 두루뭉술했던 나와 달리, 동생은 이치를 밝히거나 전후 사정을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나는 주로 집안에서 소일했고 동생은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선머슴처럼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생김새도 그닥 닮지 않아 둘 중 하나는 주워온 아이가 아니냐는 우스개를 많이 듣고 자랐다.


올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사 년째 되는 가을이다. 아버지의 2주기가 지날 즈음부터 찬바람만 돌면 마음 고름 붙잡아 매어 볼 요량으로 동생과 함께 여행을 하곤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그때만 해도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고 호기심마저 왕성해 가신 분의 빈자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동생보다 유독 나를 걱정하시던 아버지였기에 세상의 벼랑 끝에 홀연히 선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말이 있다. 달이 완전히 차야 이울 듯이 마음은 궁해져야 통한다. 동생과 함께 풍수지감을 겪으며 서로 반대이던 성향은 어긋나기보다 모자란 곳을 가려주고 메워주게 되었다. 힘든 일을 함께 치른 동지애라면 동지애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매처럼 허물없는 사이도 없지 싶다. 동생도 저 느티나무 풍경이 마음에 들어온 눈치였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나무 아래에 머물러 있었지만 서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구곡 양장 같은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듯하다. 좁은 계곡의 물은 쏜살같이 흐르다가도 한 숨을 돌리고, 십리 길을 한 방향으로 내달리다가 큰 굽이를 틀기도 한다. 눕거나 서있는 바위들을 덜컹 넘고 에돌며 물은 깊어지고 더욱 푸르러진다.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곱이 곱이 흘러가는 것일 게다.


무명활처럼 굽은 산 위로 해가 내려앉았다. 형제보다 더 정겨운 자매 나무의 풍경을 가슴에 담아 돌아갈 길을 재촉한다. 강 깊은 마을이 멀어질수록 두 느티나무는 가슴으로 들어와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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