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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Feb 04. 2023

마음에 붙이는 입춘첩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詩 <봄>





이 맘 때면,

자연에게만 봄이 오는 건 아니다.

겨울이 게정거리겠지만

봄은 자연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서둘러 먼저 온다.


어렸을 때는 가끔 생각했다.

겨울이 한창일 때 봄은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까 하고.

이성부의 시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봄은 진중하고 거룩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뻘밭을 기웃거리기도 고,

한눈도 팔고, 싸움도 좀 하면서

널브러져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

슬슬 천천히 그러나 꼭 온다.


겨우내 햇볕을 쬐지 못해 우울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처럼

작은 우울 보퉁이를 끼고 있던 나에게도

"먼 데서 이기고" 봄이 돌아오고 있다.


동요 '고향의 봄'에 등장하는 꽃들이

곧 순서대로 필 것이고, 그네들의

눈짓으로 이 세상은 가득 찰 테다.

바늘 하나 꽂을 데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심장봄처럼 나긋해져라 

주문을 적어 마음에 입춘첩 한 장 

붙여본다.


문을 열면 아직은 이마가 선뜩선뜩

차갑지봄마중 가야겠다.

아파트 화단에, 앞산에, 동네 거리에,

세상 모두에게 봄볕이 유여할 때까지.




#이성부 #봄 #입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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