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詩 <봄>
이 맘 때면,
자연에게만 봄이 오는 건 아니다.
겨울이 게정거리겠지만
봄은 자연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서둘러 먼저 온다.
어렸을 때는 가끔 생각했다.
겨울이 한창일 때 봄은 어디쯤에서
쉬고 있을까 하고.
이성부의 시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봄은 진중하고 거룩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뻘밭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한눈도 팔고, 싸움도 좀 하면서
널브러져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
슬슬 천천히 그러나 꼭 온다.
겨우내 햇볕을 쬐지 못해 우울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처럼
작은 우울 보퉁이를 끼고 있던 나에게도
"먼 데서 이기고" 봄이 돌아오고 있다.
동요 '고향의 봄'에 등장하는 꽃들이
곧 순서대로 필 것이고, 그네들의
눈짓으로 이 세상은 가득 찰 테다.
바늘 하나 꽂을 데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심장도 봄처럼 나긋해져라
주문을 적어 마음에 입춘첩 한 장
붙여본다.
문을 열면 아직은 이마가 선뜩선뜩
차갑지만 봄마중 가야겠다.
아파트 화단에, 앞산에, 동네 거리에,
세상 모두에게 봄볕이 유여할 때까지.
#이성부 #봄 #입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