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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31. 2023

친구와 나의 아저씨에게 보내는 송가

희망에 바치는 송가


내 삶의

한복판에 내리는,

바다의 황혼,

포도 알 같은 물결,

하늘의 고독,

넌 날 가득 채우며

흘러넘친다,

온 바다,

온 하늘,

움직임

그리고 공간,

포말의 하얀 군대,

오렌지색 대지,

사위어가는 태양의,

불타는

허리,

하 많은

은총과 은총,

꿈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바다, 바다,

허공에 걸린

향기,

낭랑한 소금의 합창,

그 사이,

물가에서,

투쟁하며

기다리는

바다 곁에서,

기다리는,

우리,

인간들.


파도는 단단한 해안에게 속삭인다,

"모든 일이 이루어질 거야."      


파블로 네루다 詩 <희망에 바치는 송가>




파블로 네루다는 감히 신을 향해서는 서운함을 토로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연민을 가진다. 그래서 의 노래는 소외된 인간,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네루다를 민중의 시인으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다.


친구 녀석이 자기는 가톨릭 신자인데 집으로 돌아가는 캄캄한 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었단다. 자신에게만 유독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불행이 종류별로 찾아온다고, 술도 못하녀석이 소주를 반 병쯤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친구의 소주 반 병 분량주정에 나는 마시지도 않은 소주 반 병만큼의 위로를 주절주절 건넸다. 성모도 해결할 수 없고 예수도 손 써주지 못할 불행을 별똥별에게 빌고 있는 녀석을 떠 올리니 나도 술에 취한 듯 마음이 아득해진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배우가 돌아오지 않을 길로 떠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삶의 끝이면서,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 주변 인물이라는 것이 비단 피로 맺어진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들의 비극을 의미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죽음을 애달퍼하는 사람들의 심장 어느 한 구석에는 작은 상처가 생겼음이 자명하다.


그의 연기가 한 종류의 노동이라면 마르크스의 말처럼 그의 노동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팔아야 하는 상품이 된다. 우리는 연예인에게 '공인'이라는 허명을 씌워 더없이 친밀한 태도로 대하고 환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배적인 ‘갑’의 태도를 보인다. 이번 사건에서 보이듯 인간의 지배 욕망은 상대가 상처를 입었을 때 더 극악하게 나타난다. 어쩌면 열렬한 환호는 그들에 대한 지배욕망을 교묘하게 은폐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작품 속의 비극은 그래도 착하다. 그 비극들은 구원받을 수 있는 의미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비극은 이야기 속 비극보다  리얼하고 훨씬 독하다. 그가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잃는 것보다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놓친 이유는, 자신이 연기한 박동훈의 대사를 떠올리지도 못할 만큼 현실의 비극이 훨씬 지독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거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꼴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 살겠다.
너처럼 어린애가 어떻게, 어떻게... 나 같은 어른이 불쌍해서...
나 그거 마음 아파서 못 살겠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꼴 보여주지 못하면,
넌 계속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거고,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너 생각하면 나도 마음 아파 못 살 거고
그러니까 봐. 어? 봐!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나, 꼭 봐.
다 아무것도 아니야.
쪽팔린 거? 인생 망가졌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다 아무것도 아니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 안 망가져. 행복할 거야. 행복할게.

<나의 아저씨>
이선균이 연기했던 박동훈의 대사



그에게 연기란 단순한 노동의 가치로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삶을 물화하는 배우라는 일이 그의 전부였을지도 모르겠다. 텅 빈 눈과 마른 입술을 깨물며 경찰서에서 허청허청 걸어 나오던 그의 야윈 모습은 당분간 잊기 힘든 영상이 되어 버렸다. 박동훈이 불렀던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진 그가 꽤 오랫동안 그리울 게다. 이제 그는 이 부박한 세상에서 놓여나 편안할까.


친구에게 새해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이라는 낯 뜨거운 덕담을 건네기에는 지금의 시절이 모래를 입에 넣은 듯 서걱거린다. 그렇지만 1년 중 오늘 하루만큼은 네루다의 시구처럼 모든 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파도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새해에는 술을 못하는 친구가 쓰디쓴 소주잔을 혼자 기울이지 않아도 되기를. 새해에는 다친 누군가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새해에는 적어도 노력하는 사람에겐 진정한 Happy New Year가 되기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헛된 희망에 바치는 송가가 되지 않길 기도한다.



#파블로 네루다 #희망에 바치는 송가 # 고 이선균님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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