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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27. 2023

보수동 책방골목길

나를 키운 건 무엇인가


시인 서정주는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시구를 슬쩍 빌려 나를 키운 건 무엇인가.


서울에서 4년 5개월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바람이 제법 더운 기운을 실어내는 어느 6월 사표를 냈다. 오래 생각하지만 결정은 하루아침에 해 버리는 살아서는 고치지 못할 불치병의 결과였다.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그때 좁은 원룸이 싫어 책 한 권 들고 목동 공원에 나가 읽다가 해가 지면 들어오곤 했다.


인생이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틈이 작을수록 행복하다고 믿는다. 몇 달을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떠날 때와는 달리 엄마가 없는 부산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1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 속의 이야기에만 몰입하며 지냈다.


그 1년 동안 어림잡아 400여권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값이 만만치 않았던 백수는 도서대여점에서 빌려 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보물찾기 하듯 책을 샀다. 그때 보수동에서는 만 원 정도면 대여섯 권 정도 살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책을 사러 보수동에 가는 것이 내겐 유일한 외출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물론이고, 닥치는 대로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현실에서 분리되고 싶은 욕망에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는 모색도 하지 않은, 정말로 내 생에서 여백 같은 시간이었다.


책방골목은 현실로 돌아가는 법을 가르쳤다



요즘, 부산의 원도심들을 산책 중이다. 그중에 보수동을 자주 간다. 걷다가 차 한잔하고 들어오면 하루가 차분해진다. 바쁘게 살 때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인터넷 서점에서 비싸고 알록달록한 책을 척척 사들일 정도로 생활이 나아지고 여유 있을 때는 찾지 않다가, 한가해지니 자꾸 옛 생각이 나서 자주 간다. 신도시에 비해 볼품없고 내 지나간 시간만큼 낡은 곳이다. 그 많았던 헌책방들도 몇 개밖에 남지 않은 이제는 은퇴한 초로처럼 등 굽은 모습으로 퇴락했지만 내 기억 속엔 열정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제는 보수동에서 대신동까지 걸었다. 원도심의 골목들은 신도심에 비해 초라하지만, 옛날 영화로웠던 인기를 추억으로 간직한 나이 든 여배우 같은 우아함이 있다. 화장을 지운 민낯은 주름이 도드라져 보이고 드문드문 기미와 검버섯도 피어있지만, 몸씨에서는 아직 우아함이 남아있는 천상 배우의 모습이 원도심의 골목길이다.


그 골목들을 걸으면 자꾸 내 머릿속에, 옛날 밤을 새워 읽었던 이야기들이 떠 오른다. 소소하고, 짠맛 나고, 심심하다 크게 한 번 휘몰아치고, 애달퍼서 가슴치는 그런 이야기들.


내게 온 책 속의 그 많은 서사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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