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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24. 2023

잘 가

부디 다음 생엔..

낮잠을 즐기지 않는 체질이지만 요즘 피곤이 쌓였던지 책 한 권 들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일어나니 사위가 어둑해 잠시 시간을 짐작해 본다.


열어 놓은 베란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뒷산의 바람이 시원한 걸 보니 이제 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오늘 사온 냉이풀 냄새가 유난히 짙게 난다.


아레카야자를 끝까지 살려보려 했으나  잎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니 결국 사망지경에 이르렀다. 모조리 잘랐다. 이로써 몇 달  미스터 뱅갈군과 이름도 모를 몇 분盆들을 저 세상으로 인도해, 화분 킬러인 나의 저주는 끝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그래도 이번엔 일 년 남짓 살았는데 겨울을 잘못 보내지 않았나 싶다.


화원에서는 분명 겉흙이 마르면 물을 '적당히'주면 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같은데 무엇이 문젠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아니면 물을 너무 적게 줬다는 이유나 온도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항상 이 '적당히'가 문제다. 친구는 과한 관심 때문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 때문이라고도 하고,또 누군가는 몸이 안 좋으면 화분이  잘 자라지 못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한다. 요즘은 큰 화분들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쓰인다. 정 붙이지 않으려고 하나 한 살씩 먹으니 온갖 것들에게 정을 붙이게 되더라.


집 근처에 있는 화훼 공판장으로 가서 화분 대신에 누군가가 잘라놓은 냉이와 꽃 몇 송이 사들고 들어 왔다.




이제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산책길에 만나는 온갖 나무와 꽃들로도 충분한 것을, 무엇 때문에 집안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이런 사단을 만드나. 항상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 끝도 없다.


아레카야자군 잘 가. 부디 저 세상에선 훌륭한 식물로 커 가길...


산책길에 만난 유채꽃과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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