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부디 다음 생엔..

by 마루

낮잠을 즐기지 않는 체질이지만 요즘 피곤이 쌓였던지 책 한 권 들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일어나니 사위가 어둑해 잠시 시간을 짐작해 본다.


열어 놓은 베란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뒷산의 바람이 시원한 걸 보니 이제 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오늘 사온 냉이풀 냄새가 유난히 짙게 난다.


아레카야자를 끝까지 살려보려 했으나 잎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니 결국 사망지경에 이르렀다. 모조리 잘랐다. 이로써 몇 달 전 미스터 뱅갈군과 이름도 모를 몇 분盆들을 저 세상으로 인도해, 화분 킬러인 나의 저주는 끝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그래도 이번엔 일 년 남짓 살았는데 겨울을 잘못 보내지 않았나 싶다.


화원에서는 분명 겉흙이 마르면 물을 '적당히'주면 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한 것 같은데 무엇이 문젠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아니면 물을 너무 적게 줬다는 이유나 온도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항상 이 '적당히'가 문제다. 친구는 과한 관심 때문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 때문이라고도 하고,또 누군가는 몸이 안 좋으면 화분이 잘 자라지 못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한다. 요즘은 큰 화분들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쓰인다. 정 붙이지 않으려고 하나 한 살씩 먹으니 온갖 것들에게 정을 붙이게 되더라.


집 근처에 있는 화훼 공판장으로 가서 화분 대신에 누군가가 잘라놓은 냉이와 꽃 몇 송이 사들고 들어 왔다.




이제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산책길에 만나는 온갖 나무와 꽃들로도 충분한 것을, 무엇 때문에 집안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이런 사단을 만드나. 항상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 끝도 없다.


아레카야자군 잘 가. 부디 저 세상에선 훌륭한 식물로 커 가길...


산책길에 만난 유채꽃과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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