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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20. 2023

자꾸 묻는다

당신은 언제 행복하실 거예요?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들 중간고사 시험대비를 한창 하는 중이다.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 작품 중에 노희경의 드라마가 있는데, 매년 이맘때쯤엔 만나는 작품이다.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생의 간극이 가장 큰 단원이 노희경의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아닌가 싶다.


암에 걸린 중년 여자가 가족과 세상과 서서히 이별하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란 참 어렵다. 국어 문제집에서는 장면 번호마다 인희나 남편 정철, 인희의 아들과 딸의 심리를 묻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 미안함, 분노, 당황스러움, 가슴아림, 고마움등을 이런 장면에서는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Z세대인 아이들에게 사족을 붙이지 않고 감정을 가르쳐야 하는 어려움과, 가슴에 닿지 않는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아이들. 그래서 아이들은 문학 과목을 싫어한다.




노희경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드라마 <거짓말>부터였다. 그때는 대본집이 따로 출간되지도 않아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본을 구해서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 보통은 드라마나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재미가 덜하기 마련인데 그녀의 대본은 그렇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는 모두 다 보았고, 대본집이 출간되는 작품은 대본집을 사서 드라마를 다시 읽기도 한다. 그녀의 책에는 늘 자필로 메모와 사인이 들어있는데 그 메모 한 줄도 가슴을 울린다.



'디어 마이 프렌즈'를 다시 읽고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대본을 읽으며 ost를 듣기도 한다



며칠 전 출근시간이 좀 남아서 케이블 TV를 보다가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회를 다시 봐버렸다. 옥동의 죽음에 오열하던 이병헌의 씬도 무사히 넘겼는데 꼭 마지막 운동회 장면에서 운다. 눈이 빨갛게 되도록 울고, 출근하면서 바라본 무연한 풍경에 또다시 가슴이 찡했다. 항상, 남은 사람들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내 감정을 이입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노희경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란 말을 남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깎아 놓은 사과처럼 금방 상하고 변색되고, 벌레생기고, 물고이고, 그것이 사과였음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치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사랑하겠어의 '영원'은 가까운 미래에 불과하고 감정의 부패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내 경우엔 그랬다.


그런데 노희경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사랑'이란 정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때가 많다. <거짓말>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바보 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 솔로> <그들이 사는 세상> <빠담빠담> <디어 마이 프렌즈> <우리들의 블루스>도 그랬다.


그녀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그래도 늘 처음같이 싱싱하고 까끌하면서 단즙이 물씬 배어나는 사과는 없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을 사랑으로 치환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노희경이 자꾸 묻는다. "당신은 언제 행복하실 거예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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