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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12. 2023

비상(飛上), 빌리와 그 녀석



한 소년이 새처럼 난다 하늘에라도 닿을 듯이. 하지만 그 황홀한 비상이 끝나면 팍팍한 현실의 세계 광산촌으로 소년은 돌아온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와 석탄을 캐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12살 소년 빌리. 영국 영화 특유의 거친 화면 속에서 신나는 록 음악에 맞춰 현란한 발놀림으로 빌리는 춤을 춘다.


한 녀석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고1 녀석이다. 작년 말 상담을 온 어머니는 녀석의 형이 대학을 안 갔다며 이 녀석은 꼭 대학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상담을 위해 녀석의 중학교 성적표를 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운 하위 20%, 학습 능력이 많이 부족한 녀석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집에서 조금 떨어진 인문계 고등학교에 턱걸이로 진학을 했다. 가끔 이런 녀석들이 온다.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거나, 이 녀석처럼 둘 다 없거나 그런 아이들이 찾아온다. 완곡하게 거절을 했지만 녀석을 내가 떠맡게 되었다.


녀석 어머니의 친구 아들을 내가 가르쳤었다. 자신의 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게 공부 의지가 없던 녀석이 부산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을 보고 내게 온 것이다. 국어를 가르치는 사교육 선생일 뿐이지만  이런 녀석들의 마음을 얻는데 내가 꽤 소질이 있다. 이 녀석의 어머니도 친구의 아들처럼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내게 보낸 것일 텐데, 이 녀석은 내가 보아온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기초도, 사고력도, 기억력마저 좋지 않은 아이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 한편에 또 시련의 시간이 되겠구나 싶어 신경이 쓰였다.  올 1월의 일이다.



열두 살짜리 소년 빌리는 복싱을 배우다 발레에 매료된다. 발레 선생님은 빌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권투를 하는 줄 알았던 아버지는 그런 빌리에게 꿈과 환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남자는 풋볼이나 권투, 레슬링을 해야 한단다. 그래도 빌리는 동화 분홍신의 마법에라도 걸린 양 높게 높게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그런 모습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닮지 않을 유일한 길이 발레라는 것을 인정하고 빌리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혼란과 두려운 세상, 하지만 꿈이 있는 세상 속으로 빌리를 조심스레 내 보낸다.


올해 1학기 성적에서 녀석은 국어 2등급을 받았다. 속된 말로 둘의 개고생은 누구도 알리 없지만 우리 둘만은 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그전 것을 까먹어 버리는 녀석에게 맞는 교수법을 택했고, 녀석도 최선을 다해 따라왔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이 1등급을 받은 것보다 이 녀석의 2등급은 피땀 피땀 눈물 눈물의 결과다.


이제 녀석의 눈망울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길은 그렇게 녹록지 않을 것이다. 분명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녀석에게 학습은 버거울 것이 분명한데, 이제 빛이 돌기 시작한 녀석의 눈을 보면 나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서로 실망하지 말자고 얘기하지만, 공부의지가 생기면 생길수록 그 녀석에게는 좌절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의지 밖의 무언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을 딛고 꿈을 이뤄나가는 소년의 성장 영화 '빌리 엘리어트'. 어느덧 성장한 빌리가 '백조의 호수' 클라이맥스와 함께 비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녀석을 떠 올린.


좌절이 영광의 반대말이 아니듯이, 낙하가 비상의 반대가 아니다. 좌절이 없는 사람에겐 영광도 주어지지 않고, 비상을 꿈꿀 때는 낙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녀석은 몇 번의 좌절과 낙하의 과정을 겪을 테다. 그러나 높게 비상하지 못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녀석은 인간의 존재 이유에 다가간 것이니까.



백조도 한 번에 높이 비상하지 않는다. 우리, 물 위를 달리자. 그리고 충분히 좌절하자. 빌리가 그랬던 것처럼, 내일의 그 녀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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