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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Sep 27. 2023

계절은 올 풀린 스웨터처럼


이틀 동안 한 번도 선풍기를 틀지 않았다. 엊그제 산책할 때까지만 해도 꽤 덥더니, 계절은 올 풀린 스웨터처럼 한 번 풀리면 술술술 다른 계절로 잘도 넘어간다. 아주 잠깐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그냥 문득 아빠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불쑥불쑥 꽃과 커피를 사들고 찾아간다. 동생과 나밖에 없어서 제사도 차례도 어설펐고, 서툰 솜씨로 차례상을 차려봐야 먹을 사람도 없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나에게 나는 동생에게 둘 중하나는 남들처럼 결혼이란 것을 했어야하지 않냐고, 그래서 식구들을 좀 불려야 하지 않냐고 투덕투덕댄다. 어떨 때는 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지금이 편하고 좋다고 의견 일치를 보며 없이 희희낙락해 왔다. 부모님 세상에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 분명 혀를 끌끌 차셨을 게다.


명절마다 둘은 세상 사이좋은 자매 흉내를 내며 뭐든 같이 한다. 서로 혼자 있지 않도록 배려를 하는 것이다. 실은 나이를 먹어가니 명절이라고 따로 만날 친구들도 별로 없어서지만 이때만큼은 싸워도 둘이 꼭 붙어 있는다. 이번 추석은 일주일의 연휴다. 어디 다녀와 볼까 싶어 유럽이니 일본이니 계획을 세워봐도 이런저런 이유로 선뜻 나서 지지가 않아 국내 여행지 몇 곳을 골라보자 했다. 동생이 전라도 쪽을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해서 여수, 순천, 담양, 하동 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여행지마다 호텔을 예약하고 TV의 여행소개 프로그램처럼 한 도시씩 맡아서 서로 가이드를 하기로 했다. 추석날 출발인데 차가 막히면 막히는 대로 길따라 가보려 한다.


서른 즈음에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꿈꿀 때, 부모에게 끌려가다시피 버진로드를 걷는 친구들을 볼 때, 난 평범한 이 싫다고 똑같아 보이는 이름 없는 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외쳤다. 들에도 모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 못한 때였다.


자신이  가장 빛나길 바라지만 우리 모두는 들에 핀 풀꽃이다. 그 풀밭에 백합도 해바라기도 더러 있다지만 우리는 대부분 김풀, 이풀, ...  들이다. 지나세월이 내게 준 선물은 지혜로움도 성숙함도 아닌, 나도  떨기의 풀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용기였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불고 마음은 설레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외딴 풀꽃의 일상에도 계절은 바뀐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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