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조용해졌다.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던 전기포트가 자동으로 꺼지자 아무것도 소리 내는 것이 없다. 이렇게 문득 세상의 소리가 사라질 때가 있다. 자연의 소리도, 사람이 내는 소리도, 기계가 내는 소리조차 꺼진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의오후를 잠시 만끽한다.
밥 먹는 것과 책 읽는 것은 남에게 특별히 자랑할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기에음식과 책에 대한 이야기는 잘하지 않지만, 갑자기 매년 이맘때만 되면 꺼내 읽는 책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루이자 메리 올컷의 자전적 소설 <작은아씨들>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수없이 읽어 꽤 많은 버전의 책을 갖고 있고 읽어왔지만 크리스마스가 눈앞일 때, 겨울의 복판에서 문득 온기를 느끼고 싶을 때 나는<작은 아씨들>을 펼쳐든다. 아직 소녀적 취향이 남아있는 것인지 특히 1장 순례자 놀이와 2장 메리 크리스마스 부분을 좋아한다. 읽다 보면 네 자매들의 엄마인 마치 부인이 보내는 조언과 응원을 나도 받는 것 같아서 잠시동안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너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짐에 대해 조언을 해 줄게. 때론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짐은 우리에게 유익한 거야. 짊어지는 방법을 깨달으면 점점 가볍게 느끼게 된단다.
미국 남북전쟁 시대가 배경으로 굳이 전쟁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지만 전쟁에 자원한 아버지와 자매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금쪽이 상담소장 같은 현명한 어머니, 여성스럽고 착하지만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 큰 딸 메그, 언제나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작가 지망생인 둘째 조, 피아노를 잘 치는 천사 같은 소녀 베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만 돌발적이고 이기적인 면 때문에 자주 둘째인 조와 충돌하는 막내 에이미. 이 네 자매의 성장스토리에 묻어서 나도 함께 성장했다고 숟가락을 얹어본다.
가난한 이웃에게 자신들이 누릴 크리스마스 만찬을 주어 버리고, 뒤늦게 현타가 온 자매들은 맛있는 식사도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는 너무 끔찍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때 베스는 '그래도 우리에겐 우리가 있잖아'라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말에 네 자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이 소설에서 받는 위로라고 할 수 있겠다.
악인이 등장하지 않고 서사가 드라마틱하지 않아 어찌 보면 매우 심심한 소설이지만, 일상적인 것이 특별한 것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옳고 그르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그저 네 자매 각자의 선택을 서로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것이 그들을 주체적이고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어려움도 '함께' 이겨내는 지혜와 서로의 힘듦을 보듬어주는 마치네 집 자매들을 보고 있으면, 내게 없는 것을 욕망하기보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것들을 나누고 싶은 것에 생각이 닿는다. 일 년에 한 번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성탄에 어울리는 소박한 평온과 인간애를 나도 느끼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딸들이 결혼을 하든 독신으로 살든 상관없이 자존심을 지키고 안락하게 인생을 살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단다.”
이맘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캐리 언니와 작은 아씨들과 따뜻한 사과 유자차 한 잔 :)
내게 주어진 생의 온기를 모두 가불해 써 버린 것처럼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며 세운 계획은 어디론가 쏜살같이 날아가 버리고매너리즘에 빠져 하루하루 날짜를 채우고 있는 모습에 실망하다가,마치네 자매들처럼 서로를 끝까지 붙드는 따뜻한 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눈처럼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오후다.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크리스마스 무드의 멜로디를 낮게 틀어놓고 방금 끓인 차를 마시며 <작은 아씨들>을 마저 읽어야겠다. 어딘가에는 눈이 온다고도 하던데, 오늘 밤 여기에도 따뜻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