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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낡은 다이어리

by 마루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이 몹시 취했고 목이 아프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육교 위를

눈 부릅뜨고 건넌다


내려오면 공중전화부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애인의 가슴 섶을 헤집듯

주머니를 뒤져 동전 몇 개 손에 올린다


새벽까지 갈 것 같던 신호음

이어 들리는 목소리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수화기를 삼킬 듯이 끌어안고

뜻 모를 말을 게워낸다


거기,

누구 없나요

거기 누구,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 없나요


눈뜨고 일어나 보니

핸드폰에 찍힌

새 음성메시지 1건 오전 1시 25분

삭제을 눌러 지우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 마루 (2004)




즐거운 일은 바람에 흩어지고 힘들었던 일은 이렇게 글로 남는다. 내 칭얼거림을 들어줄 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글에다 투정 부렸다. 제목조차 붙이지 못한 저 시를 써 놓고 젊은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었었구나. 엄마도 없고 아빠도 잃고 남은 것이라곤 아파트 한 채와 여동생 한 명과 강아지 한 마리, 그렇게 나는 젊은 세대주가 되었었다. 앞으로 누구에게도 투정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저렇게 꼭꼭 여몄나 보다.


20년 전 다이어리를 벽장 속 낡은 상자에서 찾았다. 다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도 하나가 살아남아 있었다. 들춰보니 절절이 힘들다는 칭얼거림과 밤에 쓴 연애편지처럼 낯 뜨거운 시와 여물지 않은 생의 흔적 같은 메모들 뿐이다.


올해 여름,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해무가 자욱한 통영바다


인생의 바다가 짙은 해무에 휩싸였을 때, 앞이 보이질 않고 혹여 발을 헛디딜까 두려움에 눈물 날 때, 글을 썼다. 누구 하나 읽어 주지 않는 글이라도 쓰다 보면 저 멀리 불빛하나가 보이곤 했다. 이대로 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고, 잘 헤쳐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생겼다. 칠흑 같은 불빛이 보이지 않아도 걷고 또 걷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글을 쓸 때였다.


사랑을 내다버리고 돌아설 때도 달려와 시를 쓰고 싶었던 젊은 나는, 하루하루의 목숨을 연료로 지금 이곳에 도착해 있다. 이제 행복을 가장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호의를 의심하지도, 슬프지 않다고 이 악물지 않아도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보다 스무 살 어린 다이어리 속의 나에게.



브런치스토리는 글쓰기가 운동과 같다지만, 내게 글쓰기는 숨쉬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다이어리는 한 곡의 삶에서 지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게 한 나의 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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