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에 엄마를, 서른 초반에 아버지를 잃었다. 슬펐지만 바빴고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 속에 있었기에 그리운 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내 곁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는 서러움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심장은 매일 그리워했는지 욱여넣었던 그리움과 슬픔이 어느 날부터 끝없이 터져 나왔다. 눈가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사는 느낌이었다.
잊지 않아야 사랑이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은 온통 외로움과 슬픔과 그리움만이 흘렀다. 즐거운 이야기를 써도, 슬프다고 했다. 내 글을 읽은 수필 평론가들은 기저에 슬픔이 깔린 글, 슬픔을 애써 은폐시킨다거나 슬픔의 단애가 감지된다고 한다. 그 슬픔으로 내 문장은 허무하다고도 했다.
작년 봄 이후 한동안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써놓았던 글 다섯 편을 문예지에 발표했고, 같이 등단한 문인들 동인지에 글 한 편을 보냈을 뿐이다.
일 년 동안 읽기만 했다. 남이 차려준 밥이 제일 맛있는 것처럼 남이 쓴 글들만 읽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를 꿈에 뵈었다. 종종 야윈 모습으로 오셨는데, 어제는 표정이 달처럼 환하다. 그만 그리워하라고 말하는 듯, 이제 다른 것을 품고 살라고 말하는 듯.
어떻게든 기저에 깔려있는 슬픔을 내보내야겠다 생각한다. 한강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모두의 슬픔으로 일반화시켜 공감을 끌어낸다. 그런 재주가 없는 나는 언제나 내 슬픔에 묶여있었고 내 글을 읽는 한 사람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나만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슬픔에 관심이 없다. 나를 위하는 글에서 다른 이들이 공감할 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슬픔의 싹을 잘라야겠다고 다짐한다.
지금 나는, 내 슬픔과 이별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슬픔을 흘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