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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17화

배고픔의 저주

빵가게 재습격 / 무라카미 하루키

by 마루


빵 가게를 습격한 얘기를 아내에게 들려준 게 과연 옳았는지 아직까지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옳으니 옳지 않으니 하는 기준으로 판단하기 곤란한 문제일지 모른다. 세상에는 옳은 결과를 초래하는 옳지 않은 선택도 있으며, 옳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옳은 선택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라고 해도 상관없겠지-를 회피하려면, '우리는 실제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보통의 작가들도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있어 '단편'이란 장편으로 가는 과정이고 새로운 가능성을 점검하는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하루키의 단편들은 장편소설의 초고가 되는데, 그의 단편 <개똥벌레>는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의 제2장 '죽음이 찾아왔던 열일곱 살의 봄날'에 실려있고,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대작 <태엽 감는 새>로 태어난다.

하루키가 쓴 최초의 3인칭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몇 년 앞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단편집에서 3인칭이 시도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편의 장, 단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장편으로 재 구성되더라도 그의 단편은 여전히 묘미를 간직한 채 그대로 살아있고 또한 이후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과 함께 공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장편 <1973년의 핀볼>에 등장했던 쌍둥이 자매를 찾아다니는 내용의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이란 단편에서 보듯이 장편의 일부 모티브를 단편으로 재구성한 재미난 예도 있다. 이런 발상도 하루키스럽고 그 연결고리들을 하나씩 찾아 연결시킬 때의 쾌감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또 다른 재밋거리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여럿 만난다. 그중에는 그의 장편을 좋아하는 사람, 소설의 꽃이라 일컫는 '단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보는 삐딱한 시선과 유머러스함 그 속에서 밀도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에세이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아, 물론 나처럼 그의 작품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다. 그래서 더 즐겁게 하루키를 읽었었고, 읽고 있고, 읽을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를 가지고 있고, 읽었다 )

무거운 주제랄 수 있지만 전혀 무겁지 않게, 오히려 가벼운 터치로 그려내는 그의 단편들 중 오늘의 이야기는 <빵가게 재습격>.

전편인 <빵가게 습격>에서 주인공과 친구는 너무나 배가 고팠지만 일을 하기 싫었기 때문에 식칼을 들고 빵집을 습격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과는 달리 빵가게 주인은 그들에게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바그너의 '서곡집'을 끝까지 들어준다면 빵을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빵을 강탈한다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음에도 얌전히 앉아 음악을 듣고 그 대가로 빵을 가져온다. 그들은 '강탈'대신 '노동'을 하고 빵을 얻은 것이다.

후편 <빵가게 재습격>에서 주인공은 법률사무소에 다니면서 결혼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주인공과 아내는 극심한 공복감에 시달리고 예전에 친구와 빵가게를 습격했던 기억을 떠올려 아내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그리고는 이 공복의 원인이 어렸을 때 친구와 빵가게를 습격했지만 본래의 목적인 '강탈'대신 음악을 들어주는 '노동'의 대가로 빵을 얻었기 때문에 배고픔의 '저주'에 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총을 들고 새벽에 문을 연 빵가게를 아내와 함께 찾아 나선다. 그러나 새벽에 문을 연 빵가게는 없었다. 그들 부부는 임기응변으로 '맥도널드'를 습격해 햄버거를 강탈하고 영원으로 이어질 것만 같던 굶주림도 서서히 소멸해 간다.

사람에게 있어 '노동'이란 뭔가? 보통 우리가 말할 때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노동'을 하는 인물이 드물다.
<빵가게 습격>만 보더라도 배는 고프지만 일은 하기 싫어 단순하게 빵가게를 습격한다. 후편에서는 직업은 있지만 결국은 저주를 풀기 위해 총을 들고 빵가게를 턴다.
초기 작품인 '쥐'의 3부작을 비롯한 꽤 여러 편의 단편들에서 주인공은 모두 번역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고, 또 다른 여러 단편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업이 카피라이터를 비롯한 광고회사 직원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사회성 없는 주인공들은 어떠한 일이 자신에게 맡겨지면 또 이상하리만치 열심히 해 낸다. 비록 그것이 넓은 홋카이도에서 양 한 마리를 찾는 일이라도 말이다.

이렇듯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노동에 대한 부정은 고도로 팽창해 가는 산업사회(이 작품의 창작 시기를 생각하면)의 무수히 많은 '일거리'에 대한 반기 인지도 모르고, 아마도 원시시대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복잡한 일에 대한 부정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있어 직업(노동)이란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배고픔의 저주인 것이다. 우리는 '왜 일을 해야 하며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일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이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다.


프루스트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날 수는 없지만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소위 등단한 에세이스트지만 글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단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들 내신 등급과 국어영역 수능시험의 등급이 내게 더 절실하게 된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내 삶은 제대로 된 항로로 가고 있는 것인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한때 운영하던 블로그의 이름이 소월의 시에 빗대어 '글과 밥과 자유' 였던 것은 진정 내가 그 세 가지만을 원했기 때문인데, 내 글이 밥이 되지 않는다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빵가게라도 털고 나면 배고픔의 저주에서 풀려나려나.


아니다. 나는 지금 배고픔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노동을 한다. 운동의 법칙처럼 관성이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배고픔은 물리적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이곳 저곳에 묻어 두는 것은 나중에 배고플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다람쥐는 자기가 묻어놓은 곳의 90%는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저 버릇이고 관성이고 일종의 저장강박이다.


자신이 부지런히 노동한 결과를 잊어버린다 해도 다람쥐는 살아가고, 살아진다. 사람의 노동이 다람쥐의 노동과 크게 다를게 무엇인가. 다람쥐와 비교하다니 조롱하는 거냐고? 아니다 위대한 호모사피엔스인 내가 단지 배고픔의 저주에 걸려, 노동을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이 못마땅할 뿐이다.


내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을 배고픔의 저주로 핑계대며, 오늘도 노동을 하러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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