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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16화

위선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상의 눈물 / 전상국

by 마루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공한 학창 시절 친구의 조롱하는 눈빛, 가난한 노파의 눈물,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이 모든 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안톤 슈나크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中




요즘, 세상의 모든 악을 뿌려놓은 것 같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나, 저 멀리 지구의 다른 쪽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에게 자신의 등을 내준 지구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원인 중에서 가장 슬픈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이나 인간과의 믿음이 깨졌을 때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이 현실은 분명 '우리를 슬프게' 한다.

기표는 '우상'으로서의 위상이 무너지고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때 이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게 된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1970년대 말 어느 도시의 고등학교 2학년 교실. 새로운 담임이 부임해 온다. 새 학기 임시 반장이 된 '나' 이유대는 기표가 우두머리인 재수파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한다. 가정방문을 온 담임은 '나'에게 임시 반장을 맡아서 학급의 정보를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지만, 유대는 1학년 때 선생의 정보원을 했던 일을 떠올리며 부탁을 거절한다. 대신 자기의 친구 형우를 반장으로 추천한다. 반장이 된 형우와 담임은 재수파를 해체시키고 기표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제부터 육십육 명이 운명을 함께하는 역사적 출항을 선언한다.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이 시간 분명히 밝혀둘 것은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 버려야 하듯 여러분의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여러분 스스로가 엄단할 수 있어야 한다." - 『우상의 눈물』 P.15


이 교실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은 세 종류의 세계가 등장한다. 우선 재수파로 상징되는 '악의 세계' 그중 기표는 원시적 악마이다. 유급을 2번이나 당해 반 아이들은 그를 형이라 부른다. 재수파는 교실 안과 밖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 학교 선생님들도 포기한 절대 '악'이다.


두 번째는 악의 세계와 대척점에 있는 형우와 담임으로, 바깥에서 보면 절대 '선의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는 순수한 '악'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이라고 믿었던 세계에서 일어난다. 이 교실도 마찬가지다. 담임선생과 반장 형우는 표면적으로는 '선의 세계'로 보이지만, 가장 악랄한 '악'의 세계다. 특히, 담임의 경우 선을 위장한 세력, 즉 교활한 천사 같은 존재이다. 이제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는 신화적 존재였던 기표는 담임과 형우의 합법적이고 선을 가장한 압박에 길들여지고 오히려 무서움을 느낀다.


나는 형우의 눈꼬리에 매달린 교활해 뵈는 웃음을 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
"유대, 네 말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을 않겠다."
"대답해라. 대답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다그쳤다.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옳은가는 네 자신이 생각해도 된다."
"네 의협심을 존중한다."
내가 간단히 손을 들어 버리자 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P.25


세 번째 세계는 이 소설의 관찰자인 '나' 이유대처럼 방관하며 두 세계에 휘둘리는 '중간 세계'의 반 아이들이다. 형우는 기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커닝을 주도해 기표의 유급을 막으려 한다. '나'는 그런 형우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냉소적 태도를 보이지만 형우의 잘못된 확신을 의협심으로 포장해 주고, 넘어가 버린다. 이 장면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의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실제로 폭력을 행하는 주체의 ‘악함’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고도 묵인하고 방관하는 이유대와 같은 인물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 아이들이 합심한 커닝 모의를 기표는 거부한다. 그리고 재수파 아이들과 함께 형우를 폭행한다. 형우는 폭행의 주동자인 기표를 고발하지 않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의리로 미화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관한다. 그 과정에서 기표는 점점 소외되고, 재수파는 형우를 폭행한 이후 와해된다.


형우와 담임은 기표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선을 가장해 폭로하고 모금 운동을 벌인다. 담임은 제일 먼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낸다. 이 장면은 겉으로 보기에 가난한 학우를 돕자는 담임과 반장의 훈훈한 모습이지만 그 이면에는 실로 기표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기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사정이 드러나게 되는 아웃팅과도 같은 꼴이 돼버린 것이다.


"이 망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란 말이야."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내일 천일 영화사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잖냐? 그런데 이 망할 새끼가……."
그는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들 앞에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한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ㅡ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 P. 62


작가는 원시적 악마인 기표의 내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건조하게 서술하는 반면, 선을 가장한 또 다른 '악'인 형우와 담임은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작가가 간교한 악을 더 문제시하는 것이다. 요즘 사회를 지배하는 힘은 '간교함'이다. 인간의 삶에서 단순하고 본능적인 악보다 그것을 짓밟고 이용하는 간교한 술책이 더 무섭다. 합법적 권력을 이용하여 반을 통제하고 기표를 불우하고 도움이 필요한 모자라는 친구로 전락시키는 형우는 간교함의 '치'를 보여준다. 소설의 관찰자인 '나' 이유대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냉소를 띠지만, 한편으론 기표가 신화로 남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폭력은 더 강한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지배당한다. 순수한 악마성을 보여주는 기표는 선을 가장한 또 다른 폭력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형우와 담임의 계략에 의해 일순 연민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나마 담임은 간교하나 저의를 쉽게 간파당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반장 형우는 저의를 감추고 우정과 사명으로 포장하는 가장 교활한 '악'이다.

악과 악이 뒤엉켜 있는 세상이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현대 사회의 모습을 압축한 세계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당시보다 지금은 훨씬 더 '악'의 모습이 다양해지고 정교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소설 속에는 선한 인간, 정의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과 '위선'과 '방관'만 있을 뿐이다.

기표의 무섭다는 외침은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공존'이 꿈이 되어 버린 것은 또 다른 형우이자 담임이고 기표이면서 유대와 같은 인간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구원의 손길인 듯 위장하고 호의를 보이면서 상대의 날개를 꺾으려는 행동들, 다수의 행복을 위해 표적이 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란 탈을 쓴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우상' 기표는 담임과 반장의 간교함으로 신문 기사 미담 속의 인물이 된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을 택하게 된, 그럼에도 묵묵히 학교에 나온' 기표의 의지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고 아픈 부모를 봉양하는 효자로 덧씌워진다. 이렇게 왜곡된 가짜 '우상'에 무서움을 느낀 기표는 슬펐던 것이다. 선을 가장한 폭력이 순수 '악'보다 무서운 이유다. 작가는 '위선과 교활한 지혜는 더욱 질 나쁜 폭력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에겐, 천진스러울 만큼 순수 악을 타고 난 ‘우상’이 있다. 그 우상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매한 ‘재수파’도 있고, 그 우상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담임’도 있다. 또 잘못된 자기 확신을 가진 간교한 ‘형우’도 있고, 이들을 냉소하고 방관하는 ‘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의 행동 속의 숨겨진 동기를 찾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판단이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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