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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14화

엄마가 없는 엄마의 부엌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 호원숙

by 마루

음식은 기억이다. 혀끝의 기억이고, 코끝의 기억이다. 나는 부엌에 있는 엄마를 많이 보고 자라지 못했다. 음식을 못하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공사다망한 엄마였기에 하교 후 집에 가면 늘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맞아 주는 그런 소녀의 상상과 우리 집은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일찍 음식을 만들 줄 알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음식을 배운 적은 없지만 지금도 웬만한 것은 만들 줄 안다. 그것이 내 엄마가 남긴 유산이라면 유산이겠다. 의도치 않게 스스로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 준 것과, 어디서 먹어본 것을 집에서 비슷하게 따라 해 볼 수 있는 미각을 깨우쳐 준 것.


그래도 엄마가 만들어 준 것 중에 아직도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음식이 몇 개 있긴 하다. 그중 하나가 수제비다.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비만 오면 창문가에 앉아 비 구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특히 해거름 노을이라도 질라치면 절절하게 전생의 기억처럼 보이지 않는 그리움이 복받쳤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비를 좋아하면 외롭게 살 팔자라며 혀를 끌끌 차셨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머니도 비만 오면 구수하게 멸치 국물 우려내어 숭덩숭덩 애호박 감자 썰어 넣고,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넣어 수제비를 끓여 주시곤 하셨다. 후후 불어 가며 따끈한 수제비를 한 그릇 먹고 나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노곤하고 뭉클해졌다. 아마도 수제비의 맛보다는 엄마와의 관계에 서사를 부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딸이라서 가능한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 엄마가 만들던 음식을 딸도 만들어 누군가에게 먹인다는 것은 딸이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 박완서를 기억하며 딸이 쓴 에세이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부제 '엄마 박완서의 부엌'. 박완서 작가를 엄마로 둔 딸은 어떤 마음일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엄마를 따라 글을 쓰기로 한 딸이라면 엄마는 그야말로 '우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완서 작가가 타계 전까지 살던 아치울 집이 나온 적 있다. 아마도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때 개성(박완서 작가의 고향) 만둣국이 그날의 음식으로 나왔는데, 엄마가 딸에게 물려준 그 집에서 이 에세이의 작가인 딸이 엄마의 음식을 만들고, 여전히 그 집에서 살며 날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인상 깊었다.


어머니는 이 집을 나에게 물려주셨다. 그냥 살아라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고 그동안 나는 이 집에서 그냥 살았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의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재도 아니고, 마당도 아니고, 부엌이었다.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P.15


대작가 박완서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불편할 법도 한데. 딸 호원숙 작가는 엄마의 유산을 지키며 가꿔나간다. 글도 음식도 엄마가 생전에 만든 마당도. 생전 박완서 작가는 마당 가꾸기에 정성을 들였다.(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한다) 그 마당에 피고 지는 꽃들을 서툰 솜씨로 그려서 이 에세이의 손그림 에디션을 발표한 그 정성과 기억들이 딸의 손끝에서 묻어나, 박완서 작가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온다.


엄마 없는 엄마의 부엌에서 계속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슬프기도 하지만, 엄마와 늘 함께 있는 기분이리라. 계절마다 엄마가 차려 주던 그 음식을 딸이 정성껏 차려 식구들을 먹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에서는 맛이 느껴진다. 그 음식을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인다. 그러다 보면 엄마의 단정한 글솜씨를 그대로 빼닮은 호원숙 작가의 글맛에도 빠진다.


작가는 엄마의 글에 등장하는 많은 음식 이야기와 함께 박완서 작가의 삶에 태도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 애써서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가는 없지만 이렇게 딸이 그 뒤를 이어가고, 딸은 엄마를 닮아 자신의 삶을 또 견고하게 쌓고 있다. 이 에세이는 우리 곁을 떠난 박완서 작가를 더 그립게 하면서 위안을 준다. 박완서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여러 날 묵게 되신 것은 동생이 떠나고 난 후였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딸네 집에서 긴 시간 묵을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우리 집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던 그런 시간이었다.『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P.180




사람은 음식이 아니라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간다. 현재의 상황에 따라 기억이란 어떤 방향으로든 채색되고 덧칠되기 마련이지만, 그 추억들은 현재를 태우는 연료가 되고 나는 그 기억이 일으키는 힘으로 살아간다. 내 엄마는 부엌에 늘 계시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만들어 준 몇몇 음식들을 기억하려 애쓰고 재현해서 오늘의 식탁을 차린다.


내 부엌에서 재현된 엄마의 감자수프와 간장떡볶이

어려서 엄마의 감자수프를 좋아했다. 하지만 내 엄마의 감자수프는 내가 아파야지만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아픈 날에는 엄마가 집에 계셨다. 감자수프를 먹고 싶어서 부러 아픈 척을 해보아도 엄마는 속지 않았다. 귀신같이 알아챘다. 진짜 아파야만 먹을 수 있었던 감자수프를 이젠 사라져 버린 엄마의 부엌이 아니라 내 부엌에서 시시때때로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빨간 떡볶이 대신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간장 떡볶이도.


엄마와 살뜰한 관계였든 아니든, 부엌에 늘 계시던 엄마든 아니든 이렇게 딸이라서 가능한 것들이 있다. 엄마가 없는 엄마의 부엌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던 소녀가, 이제는 엄마가 없는 내 부엌에서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엄마와 딸이라는 실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딸 호원숙 작가와 엄마 박완서 작가처럼, 나와 내 엄마처럼.


엄마의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근사한 식탁 한 번 차려 본 추억이 없는 것이, 조금 슬프다. 내 부엌에서 엄마를 위한 소박한 식탁 한 번 차려 드릴 기회가 없다는 것은, 조금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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