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무라카미 하루키
이 소설은 하루키 최고의 졸작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어차피 하루키와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성격상 그런 평단의 얘기에는 그닥 신경 쓰지 않을 듯하다. 이 소설은 사랑과 섹스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인데, 옮긴이 김난주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운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 결함을 채우려, 자기의 절반을 찾아 기우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한다. 또 그 마음을 확인하는 행위를, 하나가 되기 위한 의식을 '섹스'라고 한다. 그리고 '결혼'이란 그 사랑과 섹스가 지속적으로 용인되는 제도이다. 결국 완전한 사랑과 섹스로 이루어지는 행복한 결혼이란 없는 것이다" - 번역가 김난주
외동으로 태어난 12살의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주인공 하지메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자신감이 결여된 소년이었고, 시마모토는 한쪽 다리를 저는 소녀였다. 둘은 냇 킹 콜의 '국경의 남쪽'이라는 노래를 뜻도 모른 채 들으며, 자신들의 삶에 있어 무언가 중요한 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곤 했다.
넷 킹 콜이 부르는 <국경의 남쪽>이 먼 곳에서 들려왔다. 물론 냇 킹 콜은 멕시코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걸 알 수 없었다. 국경의 남쪽이라는 말에는 왠지 불가사의한 울림이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늘 국경의 남쪽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른 뒤 하지메는 그때를 회상한다. '그때 우리는 그 영어 가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것은 우리에게 노래 가사 그 이상이었다'. 하지메와 시마모토는 어린 시절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조용한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메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사를 하게 되고 둘은 조용히 헤어지게 된다. 그 후 사춘기의 하지메, 그는 이즈미라는 여자 친구를 좋아하지만 시마모토를 잊을 수 없었고, 거기서 기인된 상실감을 이즈미의 사촌언니와의 섹스로 풀어낸다. 그 결과로 이즈미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채 도쿄로 떠난다.
하지메는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취직해서 8년을 의미 없이 살아간다. 여행지에서 유키코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재즈바를 연다.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체인점까지 낸 서른일곱 살의 하지메는 가슴 한 편의 구멍을 안은채 조금씩 여유를 찾아간다.
어느 날, 재즈바를 소개한 잡지에 실린 하지메의 기사를 보고 학창 시절 친구들이 찾아오는데 이즈미의 소식도 듣게 된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가 평온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이즈미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다행히 이즈미는 찾아오지 않는다.
얼마 후 잊을 수 없었던 첫사랑 시마모토가 찾아온다. 25년 만의 재회였다. 그녀는 다리를 치료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지난날 채울 수 없었던 마음의 빈 공간이 바로 시마모토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아내와 아이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마모토를 온전히 소유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녀는 떠나버리고 그의 삶은 진행할 방향을 잃고 이전보다 더욱 큰 공허함과 상실을 느낀다. 그는 결국 부인 유키코에게 시마모토와의 일을 고백하고 일상으로 돌아 올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바다에 내리는 비를 생각한다.
하루키의 전 주인공들이 무얼 잃어버리고 또 그것을 찾으려 하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에서는 안락한 생활을 하던 '나'가 시마모토를 만남으로써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한꺼번에 상실해 버린다. 상실함으로써 자신의 소년 시절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나라는 인간에게는 무엇인가가 크게 결락되어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언제나 굶주리고 메말라 있다.
하지메는 하루키 소설 속에서는 보기 드물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는 현실세계에 있다. 그러나 하지메에게 그 현실세계는 오히려 불완전하다. 그를 완전한 세계로 이끌어 하지메의 평범성을 제거하는 인물이 시마모토이고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적인(나오코나 키키 같은) 여자다.
과거 속에서 한쪽 다리를 절던 시마모토는 전혀 다른 (다리도 절지 않고 훨씬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하루키가 살아가던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시대(1990년대)의 극적 도래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시대에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이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공동 투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개개인의 자기 내면에서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여간 다시 한번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어떻게 자신을 이화(異化)시키느냐,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 가느냐, 마치 <양을 쫓는 모험>에서 '쥐'가 '양'을 삼킨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삼켜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곳에는 공동 투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자신도 '피터 캣'이라는 재즈바를 경영했듯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는 주인공이 직접 재즈바를 경영한다. 그의 소설에는 재즈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도 많은 재즈 넘버가 등장해 레코드를 찾아보게 만든다. 하루키는 평범한 일상을 단순한 '평범함'에만 머물게 그리지 않는데, 그것이 연주할 때마다 달라지는 재즈의 변주 방식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재즈가 듣고 싶은 날 이 소설을 읽는다. 30년 가까이 읽어왔던 하루키는 내게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국경의 남쪽에 존재하는 삶과 태양의 서쪽에 존재하는 허무는 인생의 이중적인 모습이다. 무언가를 찾고 또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