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 J.D. 샐린저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을 항상 눈에 그려본단 말야. 몇 천 명의 어린애들만이 있을 뿐 주위에는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가지고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지.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런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
영화 '컨스피러시'에서 살인범들은 모두 이 책을 가지고 있고, 주인공 멜 깁슨이 음모를 찾는데 지침서로 활용한 것이 바로 『호밀밭 파수꾼』이었다. 또 존 레넌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과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한 존 힝클리 주니어도 이 책의 열혈 독자였다. 그렇다고 뭔가 상징이 가득하고 난해한 책은 아니다. 보통 정서를 갖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그런 미치광이(?) 혹은 남들과는 다른 코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즐겨(?) 애독한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지만 그만큼 샐린저의 『호밀밭 파수꾼』이 특별하다는 것이 아닐까.
홀든 코울 필드는 펜시 고등학교에서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에서 낙제를 한다. 그 결과로 그는 퇴학을 당한다. 그러나 본인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것이 처음이 아니므로 그리 슬프거나 실망스럽진 않았다. 학교를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미치광이 같았던 이틀간의 여정을 회상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홀든은 조금은 과장된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소심하다. 나의 주의를 끄는 그의 표현은 숫자를 아주 과장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형 D.B. 의 큰 침대를 가리켜 가로 2마일쯤 되는 침대라고 한다든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부모의 손을 잡고 쇼핑을 나온 어린애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수만 명은 되어 보인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지언정 아무나 겪지 않을 일들을 16세의 소년 홀든은 겪는다. 사랑하는 동생 앨리의 죽음이라든지, 학교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친구, 그리고 학교 부적응자가 되어 다섯 번이나 퇴학을 당한 소심하고 여린 소년 홀든. 그에게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독거려주지도 않는다. 사회가 소년에게 등을 돌린 것인지 아니면 홀든이 사회에 등을 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선적인 학교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홀든의 조언자는 그의 어린 여동생 피비이다. '오빠는 싫어하는 게 백만 가지도 넘을 거야, 좋아하는 걸 한 가지만 말해봐'라는 동생의 질문에 홀든은 집중해서 생각하려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 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낭떠러지 쪽으로 가는 아이들을 지켜 주고 싶은 게 유일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다라고.
홀든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동생에 털어놨을 때는 이미 세상과, 기성세대에 대한 심한 상처가 쌓인 후였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선생님이 그에게 했던 변태적인 행위가 과연 그냥 애정의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변태적 행위였는지 조차 그는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이른 것이다. 결국 홀든은 서부로 탈출하려는 계획을 동생 피비 때문에 접고, 집으로 돌아와서 정신요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병원을 나와서 다음 학기에 어느 학교에 가기로 정해졌는지 하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이 현재 정신분석 전문의에 의해 치료를 받고 있으며 그 멍청한 전문의는 9월부터 학교에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느냐는 어리석은 질문만 해 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이곳 병원에 있는 정신분석 전문의가 이번 9월부터 학교에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느냐고 자꾸만 묻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는 것 같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야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
보통의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여러 가지 일들 거치면서 성숙하고 현실과 그럭저럭 타협하는 법을 배우면서 슬프지만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홀든은 그런 통속적인 성장에 실패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헤맨다. 그렇다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실패한 성장소설이 된다. 하지만 성장이 멈춘(혹은 거부한) 홀든과 우리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도 홀든처럼 방황하는 인간들이며, 결말이 명쾌한 것은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결말은 그렇게 명확하지가 않다. 자유라는 눈부심과 이별하는 것이 고통임을 안 홀든은 혼자만의 방황 끝에 깨닫는다. 이곳에서 견딜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홀든이 반복적으로 했던 질문, '센트럴 파크의 연못에 살고 있는 오리들이 겨울이 되어 연못이 꽁꽁 얼면 어디로 가느냐. 트럭이 와서 다른 연못으로 싣고 가는지, 아니면 좀 더 따뜻한 곳에 있는 연못으로 오리들이 날아가는지, 아니면 꽁꽁 언 연못 주변의 풀숲에 그냥 살고 있는지'라는 질문이 계속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가 바로 홀든이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꽁꽁 얼어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일 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마지막 장면에서 미도리를 애타게 부르던 와타나베. 미도리가 어디 있느냐고 계속 물었지만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홀든도 역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오리에 비유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너무 좋아해서 일본어로 번역 출판했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홀든은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개츠비를 미치도록 좋아하게 되었고 『귀향』을 읽고 토마스 하디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하는 소년이다.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의 레이코 여사는 와타나베에게 홀든과 말투가 비슷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홀든이 나이를 먹으면 와타나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억측이 아닐 것이다. 성장한 탓인지 와타나베가 좀 더 사회적 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체는 어른이지만 나이는 16세인 홀든. 소년의 세계관에서 어른의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앞둔 홀든은 두 공간 즉, 아이도 어른도 아닌 두 세계가 혼재해 있어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꼭 읽게 한다. 어렸을 때 읽었던 것과 지금의 기성세대에 이르러서 읽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홀든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지만, 어른이 되어 읽을 때는 세상과 타협하라고 홀든을 타이르고 있다. 잃어버린 순수함이 스멀스멀 피어나려 할 때도 애써 모른 척 하기 일쑤다.
홀든이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저 미성숙한 소년의 투정이 아니라 '순수'라는 가치를 잃어버린 어른들의 거울이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낭떠러지로 다가가는 아이들을 지키게 되었을까? 물론, 결말은 알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