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른은 슬픔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슬픔들을 겪어왔기 때문에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슬픔’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슬픔을 관조할 수 없다. 슬픈 이야기의 끝을 알기엔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ㅡ그럼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스스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뒤로 지우는 상상 속 흐린 형상의 어른에게 물었다.
ㅡ어떤?
ㅡ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요.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요.
상상 속 어른은 잠시 침묵하다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남기는 어렵다'라고 했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그리곤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ㅡ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이 중 하나는 거짓말』 P.10
성장
성장스토리는 타성에 젖어 있다. 나가고 돌아오면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그 자리서 멈춘 인생도 있고, 오히려 퇴행하는 인생도 있을 수 있다. 성장이라는 것이 매번 우아하고 숭고할까. 그렇지 않다. 성장이라 미화하면서 매번 고난과 시련만이 계속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성장한다는 것은 아픔과 상실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 고통 위에서 자신의 양심과 그에 수반하는 가책, 추한 모습까지도 오롯이 마주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만 하는 성장소설은 없다. 성장하는 대가로 반드시 무엇인가를 잃는다. 성장의 이면은 미숙하기 때문에 그만큼 처절하다.
공감
고등학생인 세 아이는 한 번도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서로 교집합처럼 맞물려 있다. 지우는 소리를 알고 있고, 채운을 멀리서 바라본다. 소리는 지우와 채운을 모두 안다. 채운은 우연히 알게 되어 지우의 만화를 읽는다. 지우의 만화는 채운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지우 자신의 이야기고, 소리는 채운의 반려견 뭉치의 손을 잡아 죽음을 예감하고 지우의 도마뱀을 맡아 기르면서 채운과 지우에게 공감한다. 채운은 마음 졸였던 자신의 비밀이 실은 지우의 비밀이기도 했음을 알고, 깊은 안도와 함께 지우의 아픔에 동화된다.
비밀
채운이는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를 찔렀다. 소리는 손을 잡으면 죽음을 본다. 지우는 채운처럼 자신도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찌르려고 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쌓이지만 세 아이는 서로의 깊숙한 부분을 공감하며, 인생의 한 챕터를 끝내고 다음 챕터로 넘어간다. 이것이 이들의 성장이다. 도마뱀처럼 어느 순간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탈피하며 그들은 나아간다. 성장이란 매일매일 조금씩 크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커 버리는 것이다.
상실
채운은 유일한 가족인 반려견 뭉치를 잃고, 지우는 엄마와 함께 가정이 사라져 버리고 도마뱀 용식이도 잃는다. 소리는 엄마를 잃고, 채운의 가족인 뭉치와 지우가 맡긴 도마뱀 용식을 잃는 것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아직은 보호받아야 될 나이인 세 아이들이 어떤 대상의 보호자가 되고 책임을 지려고 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인생에 대해 유연하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른들보다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들은 성장이 아니라 상실과 맞바꾸면서 성숙해진다. 누가 어떤 것에 대해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닫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생각해 본다.
거짓말
다섯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어야 하고 상대는 그중 무엇이 거짓말인지 가려내야 하는 것이 게임규칙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누군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소개에 진심을 담을 필요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거짓이라도 괜찮다. 각자 몫의 거짓은 거짓대로, 비밀은 비밀인 채로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하나의 거짓 문장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끼워 넣어 이루고 싶은 소망을 투영시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P.232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233
이 이야기는 슬픔은 아직 몰라도 될 아이들의 성장이야기가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슬퍼야 하는지를 이미 아는 어른들을 위한 소설이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몇 날 며칠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나는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지만, 유독 세 아이의 현실에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소리는 죽음을 보지 않고 다시 누군가와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지우는 선호 아저씨와 가족이 되어 근질거리는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다시 쥘 수 있기를. 채운은 바람돌이의 축하를 받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떠날 수 있기를.
어쩌면 인생이란, 음악 없이 춤을 추는 것과 성장 없는 성장소설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