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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10화

항복하면 죽는다 투쟁하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by 마루


나는 SF 영화는 매우 좋아하지만, SF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SF를 소설로 읽으면 장면 장면들을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구현해내어야 하기 때문에 소설로의 몰입을 방해한다. 하지만 정보라작가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분명 SF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현실적이고, 개연성 있어 보인다. 문어와 대게가 말을 하는데도 말이다. 전작 『저주토끼』때도 그랬다. 그렇다면 정보라작가는 진정 리얼리스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소속이고 2018년에 우리 노조는 국회 앞에서 고등교육법 개정 농성을 했다.
- '작가의 말' 中


「문어」「대게」「상어」「개복치」「해파리」「고래」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은 모두 포항의 해양 특산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가는 결혼 후 남편의 고향인 포항에 정착했고, 포항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의 제목을 '포항소설'이라고 지었는데, 출판사의 적극 반대로 지금의 제목이 되었다.


모교 연세대를 상대로 시간강사의 퇴직금 등 처우 개선을 위해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작가의 실화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농성 중인 대학 본관에 나타난 외계에서 온 '문어'는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호기롭게 외치지만 농성 천막을 지키던 위원장의 무기 한 방(핸드폰을 문어대가리로 던짐. 핸드폰의 상징을 한참 생각했다)으로 기절한다. 이 문어를 잡아먹은 위원장이 바로 작가의 남편이다. 비현실적 이야기지만 위원장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위트 있는 서사다.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함께 투쟁을 이어나간다.


'문어'에는 제가 왜 남편에게 반했는지, 그리고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가 들어있어요.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이기도 하네요." - 작가 정보라

러시아의 심해 가스관 건설에 투입되어 노동착취를 당하던 '대게'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구룡포 가짜 수산물 업자들에게 희생당하는 '상어'와 바다생물들, 지역 산업 단지의 글로벌 투자자들의 비인간적 행태와 노동자의 부당해고와 관련된 '해파리', 일본의 원전 폐수 해양 투기와 관련된 '고래'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다. '개복치'만은 결이 조금 다른 소설인데 읽다 보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처럼 환상적인 이야기에 '각자 삶을 이어가는 방식'을 인정하면 된다는 묵직한 주제의 단편이다.


매 소설마다 등장하는 '해양정보과'라는 검은 옷을 입은 덩어리들에게 부부는 계속 연행되고 억류되며 이야기는 연결되고 유기성을 갖는다. 각각을 단편으로 봐도 이야기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지만, 역시 연작소설이니만큼 연결해서 읽으면 전편의 에피소드들이 잠깐씩 언급되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소설 속의 부부가 현실에서 작가 부부이다 보니 그들의 삶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여섯 편의 소설들 모두 현실 고발적인 부분과 작가 특유의 유머와 남편의 암투병과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가 적절하게 녹아있다.


열받으니까 글을 쓴다는 작가는 어설픈 비유나 은유를 사용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마치 속사포로 랩을 하듯이 긴 문장으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데, 유머러스한 문체와 달리 주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노동자의 생존권, 서로 이권전쟁을 벌이는 뉴 제국주의, 인간의 이기로 인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 원전 오염수 문제 등 현실에서도 답을 도출하기 어려운 부조리들이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책을 엎어놓고 곱씹어보게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런 부조리를 단시간에 해결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고 연대해야 하며, 그 첫걸음이 '저항'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연대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고 하더라도 '연대'라는 골자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서로 대화하지 않고 적대시하며 양 극단으로 치닫는 연대는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또 하나의 부조리다.


세계가 안고 있는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더 나은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작가가 저항하고 끝없이 데모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조금씩이라도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한 마중물이다. 그래서 정보라 작가의 SF소설은 결코 우리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문어나 대게가 말을 걸어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듯하다.


이제 애인님이 된 위원장님을 바라보면서 가끔 그때 학교 복도에서 비린내를 풍기며 눈이 돌아가던 거대 외계 문어를 생각하곤 한다.
지구 ㅡ 생물체는 ㅡ 항복하라.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나와 위원장님은 데모하다 만났고 나는 데모하면서 위원장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함께 데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육 공공성 확보와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 해방과 지구의 평화를 위해 계속 함께 싸울 것이다. 투쟁.
-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중 「문어」 P. 46





정보라 작가의 소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와 에세이 『아무튼, 데모』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소설과 현실은 분명 다른 갈래지만, 하나의 작품으로 읽힌다.

‘자유주의적-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꼭 내 눈앞에서 이상향을 보는 순간이 오지 않더라도 어쨌든 더 좋은 앞날을 위해서 계속 노력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 성평등, 여성해방, 장애해방, 노동해방, 인권존중, 세계평화를 외치는 많은 동지들이 그런 완벽한 세상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 소리치고 행진하고 파업하고 농성하고 투쟁한다. (중략) 나는 전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데모해도 크게 불이익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퇴직했으므로 이제 더 잘릴 직장도 없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있는 내가 행진이라도 한 번 더 하고 구호라도 한 번 더 외치고 집회를 할 때 머릿수라도 하나 더 채우면 나와 동지들이 원하는 세상이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고 더 가까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 정보라 『아무튼, 데모』 P.168~169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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