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 나희덕
슬픔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슬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슬픔이 나를 통과해 갔지만, 오직 시들만이 시간이 벗어 놓은 허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슬픔에 기대어 시를 쓰게 되었고 타자의 슬픔 곁에 머물 수 있었으니, 슬픔이란 식솔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숨 가쁘게 밀려들던 고통의 나날,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라고 탄식하던 때를 떠올린다. 무작정 피어 있던 그 시간을 향해, 그 어리숙했던 나를 향해 가만히 손을 건넨다. 꽃인 줄도 모르고 잎인 줄도 모르고 피어 있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니. ㅡ 나희덕
시를 좋아하다 보니 좋아하는 시인도 여러 명인데, 그중 한 명 꼽으라면 하루종일 고민할 듯하다. 한 다섯 명쯤 골라보라고 한다면, 고민은 되겠지만 나희덕 시인을 꼽을 수 있겠다. 나희덕 시인은 시인이지만 산문도 참 잘 쓰는 시인이다.
작가의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희덕 시인은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그럼 고아인가 싶지만, 아니고 어머니께서 보육원에서 일하셨다. 스무 살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면서 원생들과 엄마를 나누어야 하는 슬픔을 우리가 어찌 짐작할까. 아마도 어머니는 원생들과 딸을 똑같이 대하셨을 테다. 하지만 시인은 부모 없는 또래의 마음을 헤아리고, 곁에 계신 엄마를 그리워만 했을 것이다. 나도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시인의 슬픔에 제 슬픔을 얹어서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졌었다.
이 시집의 부제는 '나희덕 젊은 날의 시'이다. 첫 시집 『뿌리에게』부터『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접 고른 시들로 묶었기에, 실로 나희덕의 초기 시의 고갱이만 솎아 낸 시집이다. 그만큼 귀하디 귀하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전문 P.24
복숭아나무는 누구인가? 바로 부모님이다. 어머니는 보육원에서 일을 했기에 시인은 늘 외로웠을 테고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지나치기만 했다. 그런데 멀리서 복숭아나무를 지켜보다 깨닫는다. 복숭아나무의 꽃에도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지만, 시인은 그제야 저녁이 오는 소리를 복숭아나무 곁에서 듣게 된다. 반가운 엔딩이 아닌가.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별했지만 시인은 현명하게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을 먼 길 돌아 찾은 것이다.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못 위의 잠」 부분 P.39
제비 아비는 식구들에게 좁은 둥지를 내주고 그 옆에 누군가가 박아 놓은 작은 못 위에서 잠을 청한다. 세상 아버지들은 그런 존재다. 시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모든 아버지들은 못 위에서 잠을 청한다. 시인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애상에 나도 내 슬픔을 얹어 좋아하는 시가 되었다. 또 하나 부모님을 떠 올릴 수밖에 없는 시가 있다. 「뿌리에게」는 흙의 순환적 삶을 통해 생명과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는 시다.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뿌리에게」 부분 P.16
나희덕 시인은 생명, 사랑, 너그러움, 사소한 것에 대한 경외 그리고 특히 모성애를 모티프로 한 시가 많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시인이 추구하는 것, 또는 시인의 심성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특히 나희덕의 시에는 '흙'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다. 흙은 바로 '모성'을 상징한다. 그 모성을 주제로 놓으면 모든 것들이 일렬횡대로 그 아래 놓이게 된다. 인간과 자연, 성장, 고통, 사랑, 비애까지도 '모성'아래에 놓이는 것이다.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귀뚜라미」 부분 P.63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 부분 P.105
시는 짧다. 하지만 그 행간은 지구를 두어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록 길고 깊다. 시인은 10년 후의 자신에게도, 20년 후의 자신에게도 편지를 쓸 게다. 시인의 편지는 시가 되고 또 나는 시인의 행간을 찾아 천천히 걷겠지 아마도. 나희덕 시인과 함께 걸어가는 그 여정이 기대된다. 만질 수 없지만 보이는 것이 나희덕의 詩다.
시인의 슬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슬퍼서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어서 모든 것의 눈물을 보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