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는 장미의 시인으로 불릴 만큼 장미를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어, 그가 장미의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다소 낭만적인 소문이 떠돈다. 그렇지만 나는 릴케 하면 라일락이 떠 오른다. 내가 라일락이 피는 어느 시점에 릴케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테의 수기』는 분명 소설이지만, 릴케는 자기의 체험을 직접 쓴 기록인 '수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말테는 릴케 자신인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 (……) 골목 온 사방에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냄새를 구별해 보자니 요오드포름과 감자튀김 기름, 불안의 냄새가 났다. -『말테의 수기』(열린 책들) P. 7~8
문화의 도시로 환호받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말테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자신의 삶을 관조하듯이 파리를 관찰하며 사람들이 가진 얼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그 얼굴들 속에 드리워져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삶과 죽음, 사랑, 고독들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이야기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실존'과 연결된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파리라는 도시가 그에게는 비정하게 느껴진다. 도시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도처에 죽음이 가득하고, 불안과 공포를 부른다. 마치 폭풍 전야 같다고 느낀다. 말테는 각자 다른 방식의 죽음이 아니라 규격화되고 상품화된 도시인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과 대척점에 있다. 사람들은 씨앗처럼 저마다 자기의 죽음을 품고 태어나지만,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지 못한 채 병원에서 죽어간다고 느낀다.
71개의 단편적인 글들로 연결되어 있지만 소제목이 붙은 글은 2개에 불과하다. 독일어로 쓰인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 직전 근대소설만 하더라도 기승전결이나 서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지만 '수기'라고 이름 붙여진 이 소설은 서사가 없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지 않고 그때그때 말테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몽타주방식이랄까,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할까. 아무튼 소설로서 읽어내기가 녹록지 않는 작품이다. 이미지즘 산문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고, 여느 때 같으면 언제나 끝이었던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게는 내가 몰랐던 어떤 내면이 있다. (……) 내가 벌써 말했던가?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렇다, 나는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잘 안된다. 그러나 내 시간을 잘 이용해 보려 한다. - P.10
내가 처음 수필을 쓰기 시작할 때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이 소설을 추천받았다. 소설의 서사가 아니라 릴케가 시인인 만큼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고, 그의 비유를 느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몇 페이지씩 읽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지금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처음부터 읽어도 말테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덴마크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청년 말테는 인간이라면 경험해 보지 못할 사후의 경험인 죽음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 올린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자신 안에 품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죽음이었다'라고 추억한다. 한 인간이 세상을 떠나는데 이 정도의 작별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말테가 배운다는 '보는 법'을 나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늘 삶과 함께 있고, 희망도 절망도 샴쌍둥이다. 제대로 보는 법을 배운다면, 죽음도 삶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자기만의 죽음을 갖겠다는 소망은 점점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자기만의 죽음은 자기만의 삶만큼이나 드물게 될 것이다. 맙소사, 모든 것이 이미 다 마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면 다 짜여진 하나의 삶을 찾아 기성복처럼 그것을 걸치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의지가 있든, 아니면 강제로 떠나든 너무 애쓸 필요가 없다. - P. 15
말테가 생각하는 현대인의 삶(100년 전이 현대랄 수 있을까 싶지만)이란 다층적인 면을 보인다. 그렇기에 행복과 불안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현대의 삶을 잘 보여주는 곳이 대도시인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내면의 고독을 이 소설보다 더 철저히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글이 있을까. 『말테의 수기』는 분명 지금 현대인들을 위해 100년 전 현대인이었던 릴케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타임캡슐이다.
'받는 사랑은 공허하고, 주는 사랑에서 인간 실존이 창조된다'라는 말테의 말처럼 세상과의 대결도, 자신과의 대결도 결국 인간의 실존과 고독의 문제다. 그 문제의 답은 세상과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말미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은 어쩌면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려는 릴케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원고지들로부터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의 온전한 현존재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 허구의 젊은이가 (파리에서, 그리고 파리를 통하여 되살아난 추억에서) 내면적으로 겪어 낸 것들은 도처에서 한없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더 많은 기록들을 첨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기록해야 하며, 모든 시간들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테는 말한다. 그래야 인간의 실존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옳다면 생각이 둥둥 떠다니는 내 머릿속과 어떻게든 나를 기록하려는 본능에 안도한다.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방법을 짐작해 본다. 세상은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는 결국 말테처럼 혼자지만, 현존하는 죽음을 직시해야 삶의 실존도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