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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20화

우리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줬으면 그만이지 / 김주완

by 마루

요즘처럼 분열된 우리 사회에 죽비 소리처럼 울려 퍼질 어른의 한마디가 있다면, 사람들은 과연 그 말을 새겨듣기나 할까? 모두가 차안대를 쓴 경주마처럼 자기 세계만 보며 달리는 세상,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을 향해 마주 보며 내달리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역주행하여 극장에서 재개봉까지 된 이야기 <어른 김장하>. 김장하 선생을 취재한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다큐멘터리는 방송당시에 보았지만, 책은 최근에 읽었다. 책을 읽고 다시 OTT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진주에서 '남성당 한약방'(2022년에 폐업)을 운영하던 김장하 선생은 꼰대 같은 어른들을 주로 보아온 우리에게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할아버지께서 오래 살라고 남극노인성이란 별이름에서 '남성'을 따와 아호로 지어 주었고, 그 이름을 그대로 한약방 이름으로 내 걸었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사람은 마땅히 올바른 것에 마음을 두어야지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고, 손자 장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 저의 뜻에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 오늘날 김장하의 철학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줬으면 그만이지』- P.36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약사 면허 시험에 합격한 후, 19세 무렵 한약방을 개업한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이유는 약값이 매우 저렴했고, 아픈 사람이 약을 먹고 나으니까 영업이 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고 아픈 사람을 상대로 번 돈을 자신의 호의호식에 쓸 수 없다고, 지역 사회 다양한 분야에 조건 없이 지원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이다. 김장하 선생께 지원을 받아 훌륭하게 성장한 제자들의 모습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 책은 그저 한 인물의 평전이나 위인전보다 오히려 무게감이 느껴진다.


한 명이 손을 잡아주자 지역 사회에서는 언론, 문화 할 것 없이 다양한 선순환을 불러오지만, 김장하 선생은 인터뷰나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이 취재기도 주변 인물들을 돌면서 중심인물 김장하 선생에게로 나아간다. 비단 그의 행적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김장하 선생의 철학을 완벽히 짚어볼 수 있는 기록이다.


<어른 김장하> 네이버 포토


주변 인물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김장하는 '공부를 많이 한 스님' 또는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빙하 같은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평을 한다는 것 자체를 송구스러운 일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대통령 탄핵과 맞물려, 문형배 재판관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김장하 선생을 언급한 문형배 재판관은 이 책에도 등장한다. 김장하 선생에게 도움을 받은 장학생들을 비롯한 지역 사람들이 선생의 생일파티를 몰래 열어주는데, 그곳에서 문형배 재판관은 장학생 대표로 마이크를 잡았지만, 목이 멘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단상에 불려 나간 문형배(53)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목이 메어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청중이 격려 박수를 보냈다.(중략)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 P.130~131


반골기질이 있어서 정치를 싫어하고, 정치인들을 곱게 보지 않았기에 찾아오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도 없이 찾아 간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왕 오셨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시라는 김장하 선생과 '참 좋은 분을 만났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한 마디는 선문답을 나누는 선승들의 느낌마저 든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다"며 "앞으로 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P.132


"줬으면 그만이지" 이 말은 그 많은 가난한 학생들을 이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시켰지만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한 번 줬으면 그만이지 자신이 그들의 삶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묵직하다. 평생 자동차 한 대 없이 살면서 자기 이름도 남기지 않고 재산을 기부한 어른, 자신이 설립한 100억대의 학교를 나라에 통째로 헌납하고 묵묵히 한약방을 운영하며 살았던 어른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갈급하고 있는 진짜 '어른'의 모습이다.


그이도 이제 허리 굽고 굼뜬 몸피의 노인이 되셨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 번도 그분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이와 따뜻한 시간을 갖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동시대에 그분과 이어져 있었음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P. 316


나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싫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큰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 먹고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그런 낯간지러운 소릴 하는 것이라 생각하련다. 그런데 나는 뭐 다른가. 몇몇 정기 도네이션과 최근 산불피해 이재민들을 위한 기부, 전태일 의료센터 건립에 벽돌 한 장 얹는다는 심정으로 소액 기부한 것을 은연중에 누군가에게 (의지를 담아) 실토해 버리는 나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욕할 자격이 내게는 없음이다.


나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양극으로 자기 말만 앞세우는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입 밖으로 내거나, 누구의 입으로 대신 알려지는 것조차 꺼리는 이 어른이 진짜다. 인터뷰라는 것이 결국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는 것이라서 응하지 않는다는 그의 철학이 참으로 고고하다. 김장하 선생께 야단맞을 것을 각오하고 이 취재기를 쓴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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