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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북세이 22화

인생이 축제가 될까?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조승리

by 마루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당시 나는 무지했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싶었다. (...) 그래야만 내 현실을 견딜 수가 있었다.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P.16


현생을 축제라 말하는 이가 있다. 축제가 될 것이라 믿는 이가 있다. 과연 그럴까. 에세이를 읽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글'이라는 것, '쓰기'라는 것이 얼마나 평등한 것인가를 느낀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쓰겠다는 의지와 노력에 따라 급수가 정해지니까. (물론 약간의 타고남도 있어야 한다)


조승리 작가는 샘터 문예공모전 생활수필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마사지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서, 누구나 겪지만 누구라도 겪지 못할 이야기를 푼다. 입담이 걸다. 제목에 '지랄 맞다'라는 표현을 기성작가들이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첫 단행본을 내놓은 신인 작가의 패기리라. 그래서 제목부터 신선하다. 하지만 이 한 권의 단행본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수십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다.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P.22


본인도 이야기하듯 "휴먼 다큐가 어울리지 않고 코믹 시트콤에 가까운 " 모녀와의 대화와 가족 간의 대화를 이리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오히려 그 솔직함과 쾌활함이 삶을 견디는 의지였다고 여겨진다. 굳세다고 느껴진다. 수필이, 에세이가 이런 거다. 기성 작가들은 이렇게 솔직하게 쓰기 어렵다. 벌써 자기 얼굴에 가면을 씌우기도 하고, 글을 읽을 독자들의 반응을 먼저 떠 올린다. 하지만 이 당돌한 작가는 독자들을 자기 이야기로 끌고 간다. 즉,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그래주었으면 싶다.


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었다. P.15


이 작가는 손으로 사람을 만난다. 손으로만 더듬어 가기에 비장애인보다 느리다. 아마 글을 쓰는 것도 우리보다 훨씬 느릴 게다. 그러나 그녀의 글에서는 느림에서 오는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의 문장이나 필력이 아니라 작가가 가진 스토리의 힘이다.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가 가진 힘이다. 해서 그녀의 장애가 그 '지랄 맞음'이 종내에는 '축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글을 써요.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내 꿈이었어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 꿈을 정정했어요. 내 꿈은 무병장수예요.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살면서 글을 계속 쓰는 게 내 꿈이고 목표예요.” P. 198


누구에게나 지랄 맞은 순간들이 온다. 우리들도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에, 인생이란 미명아래 주고받는 사건들이 던지는 '지랄'에 좌절하고, 눈물 쏟고, 체념하기 일쑤다. 그래서 한 시각장애인 작가가 던지는 도전장은 자못 통쾌하다. 누구 인생이 더 지랄 맞나 내기해 보자는 작가에게 경외심이, 인생의 장난에 속절없이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작가에게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이 에세이집의 힘이다. 이 신진 에세이스트에게 존경을 보낸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인생은 필경 '축제'가 될 것이다.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한 떨기의 꽃이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그 혹은 그녀가 내 향기를 맡고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내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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